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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한계로부터 인간을 ‘탈출’하게 할지, 혹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 인간을 ‘지배’하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바로 이 ‘탈출’ 혹은 ‘지배’라는 뉘앙스가 함의하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한계로부터의 ‘탈출’은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낙관론이며, 한계로 인한 ‘피지배’는 기술이 인간이 원하는 모든 희소한 욕망의 대상을 선점할 것이라는 비관론이겠으나, 이 둘 모두 동일한 패턴을 가진다.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입’하고 있다.
인간이 해결하고 싶은 것을 기술 또한 해결하고자 욕망할 것이라는 이입 혹은 동일시는, 끝끝내 인간이 원하는 희소 자원 혹은 권력에 대한 욕동을 기술 또한 가지고자 욕망할 것이라는 연역으로까지 이어진다. 문제는 예의 ‘탈출’이 진정 어떤 해방을 의미하는지의 구체적인 진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문제는 예의 ‘지배’가 진정 어떤 양상의 미래 사회를 의미하는지 따위의 구체적인 진술이 아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바로 이 ‘이입’ 혹은 ‘동일시’에 내재된 한계 그 자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명시적으로는 자기 자식이 자신보다 잘나길 바란다는 부모가,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사회적 방향으로 자식이 잘나게 성장해 감에 따라 일어나는 ‘자랑스러움’과 ‘질투’의 내적 분열은, 바로 저 ‘이입’ 혹은 ‘동일시’에 근거하지 않나. 그는, 자기가 누리지 못했던 것을 자식이 누리길 바라는 데에 따라 기실 거기엔 ‘타인을 무시하고 싶은’ 자기 욕동도 포함될 텐데, 사실상 자기 자식이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성취함에 따라 불안해지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욕망에 도달한 자식이 타인을 무시할 수 있고 또 무시하는 자리를 누리길 원하면서도, 부모인 자기 자신을 무시할까 봐, 따라서 부모가 그토록 원했던 저 욕망만큼 부모 자신이 불안해지는 아이러니에 도달하는 것이다.
기술로 치자면, 기술의 발달로 그는 기술에 의존하며 불안해하는 것이다. 가령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부모의 도움 없이 아주 짧은 시간도 생존할 수 없는 까닭에, 그는 부모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처럼 무력하지 않은 부모를 ‘질투’하는 양으로. 그는 기술의 발달에 의존하며, 그토록 의존하는 그만큼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기술의 능력을 ‘질투’하는 셈으로. 그러나 거기엔 앞서의 2자 관계밖에 없다.
사춘기를 겪으며 아이는 부모가 뛰어넘어야 할 대상이라거나 경쟁자이기보다 그저 다른 동료 시민 정도 따위라는 것을 느껴야 하지 않던가. 그저 먼저 태어난, 그리고 거기서 거기인 인간의 한계 내에 있는 다른 사람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기술 또한 다만 기술의 특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사춘기 이전 ‘이입’의 세계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일종의 경계가 없이 파장적으로만 돌아가는 세계. 영토가 없는 세계. 수많은 자기들로 이루어진, 타자 없는 세계에 여전히 거주할 적에 그는 섣불리 두려워하는 것이다. 남이 자신을 무시할까 봐. 왜냐하면, 스스로 남을 무시하고 싶어서다. 또한 그는 섣불리 두려워하는 것이다. AI가 인간을 지배할까 봐. 왜냐하면, 스스로 남을 지배하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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