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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그의 ‘이입’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입이 아니긴 한데, 소위 일반적인 이입은 ‘자아’라는 내부와 외부, 경계를 감지한 상태에서 다른 ‘내부’ 혹은 경계를 따라나서며 동일시하는 현상을 뜻하는 까닭이다. 그에겐 ‘내부’도 ‘외부’도 없는, 희미하고 불투명한 일종의 ‘통일장’이라는 유아 상태밖엔 없고, 거기서 발견하는 모든 ‘다른’ 내부나 외부는 모조리 근본적인 의미에서 ‘자기’와 같다고 간주할 테니.
물론, 당연히, 그 누구라도 자기 삶이 저문다면 그의 세계 또한 저문다 하더라도, 그의 세계가 저물더라도 다른 모든 세계가 저물진 않을 텐데. 자기 자신의 인식, 나아가 느낌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별도의 사물’이, 그러니까 별도의 ‘존재’가 ‘작동한다’는 존재론이 그의 존재론엔 없는 상태에서, 이제 바깥의 사물을 인식하는 단계로의 이행은 실로 ‘기적’적인 <발달>인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세계가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혹자의 말처럼 우리 정신은 진정한 물자체에는 누구도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러면 또 어떠한가? 요는, 도달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바로 그 물자체를 상정할 수 있다는 ‘능력’의 문제다. 만일 도달할 수 없다면, 바로 이 <물자체>라는 단어 자체도 자기모순에 빠진다. 화자의 정신이 도달할 수 없는 개념을 바로 그 화자의 저술이, 그리고 그 저술에 속한 기호가 표현하고 있는 셈이니. 거기서 화자는 자기도 모르는 말을 웅얼거리는 옹알이를 하는 셈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저 기적이라는 ‘발달’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저 바깥이 ‘존재’한다는 ‘존재론’에 도달해야 한다. 그는 자기 자아상과 <아무> 상관없는 ‘존재론’, ‘사물의 존재론’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 자신이 원치 않는 ‘현실’이 느껴지기도 한다는 ‘현상’을 납득할 수 있다. 바로 거기서, 그러니까 바로 저 ‘사물의 존재론’의 탄생지에서 비로소 저 ‘비대한 자아의 존재론’은 박멸에 이를 수도 있으리라.
요컨대 저기 저 비대한 ‘자아’의 존재론이 제아무리 욕망하더라도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고 언젠가 죽는다. 인식론이 투사에 그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든 하지 않든 실재하는 현상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 인식론인 까닭이다. 경계에 도달하여, 자기 ‘자아’가 ‘전체’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고 죽지 않는다. 영토성에 도달하여, 경계를 토대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공간’적 사고에 도달하는 것이 ‘자아’를 욕보이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각자 한 개의 표밖에 가질 수 없는 민주주의에 도달했다고, 시민 개인의 개성이 제거되는 게 아니듯. 그저 무수한 존재 중 하나의 <평범한> 존재인 것이, 그렇게 그가 주체이기도 객체이기도 하다는 것이 자기 ‘자아’를 욕보이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자아’를 욕보이는 것이라고 여기는 증상이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막는 병리적인 사태 자체다.
우리 정신과 현실의 괴리가 항상 폭로하는 것은, 삶이 원하는 대로 꾸려질 수 없다는 바로 그 한계다. 바로 그 한계 바깥에 무언가 있다. 혹자의 말대로 세계가 시뮬레이션이고 우리 정신은 일종의 프로그램이라 할지언정, 프로그램 밖에 또 무언가 있을 수 있다. ‘진실’이 아니어서 ‘무의미’한가? ‘탈출’해야 한다고? 바로 이 시뮬레이션에서? 그것이 가짜인 까닭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인가? 아니, 그에 앞서서 이 ‘시뮬레이션’은 도대체 뭔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주요하지 않겠는지. 진짜가 아니라서 탈출해야 한다는 섣부른 자가 진단은, 그 자신의 ‘탈출’이라는 도착적 트라우마만 전시하는 꼴 아니던가. 그가 새로운 기술로 탈출하든, 화성으로 탈출하든, 그러므로 가짜에서 진짜로 탈출하든 간에, 왜 탈출해야 하며 진짜와 가짜는 무엇이고, 그러므로 그가 가짜라고 부르는 ‘시뮬레이션’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며, 그가 진짜라고 부르는 그 자신도 모르는 바로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문제는 그가 명분 삼는 진짜와 가짜 따위가 아니라, 그저 (소위 진짜) 유리하게 이입할 대상만 찾는 호르몬 투성이의 유아적인 주도권 싸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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