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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혹자가 다른 이에게 자아를 의탁한다면, 저 다른 이의 ‘자아’는 ‘타자’의 ‘자아’인 동시에 그의 ‘자아’이기도 한 셈이다. 소위 ‘이입’으로 치자면, 집단의 ‘이입’은 국가의 위상에 자기 ‘자아’들의 위상을 걸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음의 아이러니가 있다. ‘독립된 자아’로서의 ‘내부’를 상정하는 것은 아울러 ‘외부’를 상정해야 가능한 정신 작용이므로, 독립성 그 자체라는 <경계> 혹은 영토성, 그러니까 제 3자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는 소위 나도 남도 없는 일종의 <통일장>적인 ‘이입’으로[만] 사고할 것이다. 그가 ‘선’을 넘어 ‘면’으로, ‘공간’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저 ‘점’으로 남기 위한 수단은 ‘이입’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언제나 그러하듯 제 3자로부터 헐레벌떡 도망치는 오래된 습관이 바로 이 ‘이입’인 셈이다. 그는 바로 이 ‘이입’으로 자기 자신을 제 3자라는 객관성으로부터 구차하게나마 거듭 가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혹자와 마주치며 ‘과거의 자기’와 악수한다. 그는 다른 이를 스쳐 가며 ‘미래의 자기’를 상기한다. 그는 누군가를 보며, 어쩌면 저랬을지도 모를 ‘만약의 자기’를 떠올린다. 저 모든 사물이 각각의 ‘자기’로서 그를 응시한다. 그는 그토록 많은 ‘자기’로 이루어져 우글거리는 관객 앞의 무대에 오른다. 그는 저 버글거리는 무대 속에서만 산다. 무수한 ‘자기’로 이루어진, 느글거리는 관객석 맞은편에 마련된 급하고 경솔하게 반짝이(어야만 하)는 조악한 무대에서만 삶이 이루어진다 믿는다. 그리 영영 ‘전능한 유아’ 상태로의 나약한 ‘이입’을 거듭 시도하는 것이다.
그는 ‘외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내부’도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유화’가 뭔지 모른다. 그는 뿌리 깊은 의미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할 줄 모른다. 그는 ‘사적’인 무엇이 도대체 ‘공적’인 것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도무지 ‘일반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반대 또한 무엇인지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경계를 모르고, 그저 파장적으로 구별할 뿐이다. 저 혼동스럽고 흉물스러운 늪에서 ‘먹이’를 기다렸다 재빨리 ‘이입’하는 것이다.
이처럼 온갖 ‘자기’로 이루어진 관객 앞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내보이자고 주장하는 바로 이 ‘신격화된’ ‘자아상’이 비로소 자기 ‘상상’을 과시하는 증상들이 발견된다. 경계 없는 무수한 이입의 사태들 속에서는, 스스로 이입하고 싶은 대상 혹은 주체와의 동일시(내사)와 이입하기 싫은 대상 혹은 주체에의 투사밖에는 없다. ‘그에겐 내부도 없고 외부도 없으며, 따라서 경계도 없다’. 그리고 이 명제는, ‘그에겐 모든 것이 내부다’라거나 ‘그에겐 모든 것이 외부다’라는 몰골의 명제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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