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간 (1)

by 이채

_


제 3자로써의 타자를 발견하는 건 ‘자아’의 바깥을 상정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그와 아울러 ‘자아’를 한계 지어진 ‘내부’로 상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허나, 점이 면이 아닌 이상 내부를 상정할 수는 없다. 요는 스스로의 ‘내부’를 정의하는 순간 다른 이의 ‘내부’ 또한 정의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있다. 밖과 안을 상정하고, 주체와 대상을 상정하는 순간, 기실 스스로 오직 ‘안’이며 ‘주체’로서만 존재할 수는 결코 없다는 결론 이후의 전제를 스스로 폭로하는 셈이다. 그 자신의 ‘내부’는 벌써부터 다른 이의 ‘외부’인 것이다.


유효성의 관점에서 인식 이전에 우리가 무얼 느꼈든, 그 느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자체로 인과 관계로 포함될 테고, 우리 인식은 바로 그 인과 관계를 사후적으로라도 되감아 포착할 수 있을 터다. 설령 그 매개가 ‘논리’가 아니더라도, 말하자면 일종의 ‘감동’을 매개 삼더라도 우리는 유효성이라는 명분 위에서 이를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좀 더 넓은 의미의 ‘인과 관계’에 포함할 수도 있으리라.


기실, 하나의 점으로서 안도 밖도 없이 존립하던 ‘전능한 유아’의 정신 상태는 일종의 사후적 가설일 뿐이다. 그 상태가 무엇이라고 정의를 제아무리 내려봐야, 그 상태는 정의 내릴 능력이 부재한 ‘무능’한 상태일 뿐인 것이다.


기호로 치자면, 그 어떤 저자든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그는 표현상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이라는 시제 시점은 화자라는 주체가 없는 시점이므로 표현 불가능을 내포하고 있다. 여느 소설에서 당사자의 죽음에 이어 상황을 서술하는 1인칭 서술의 아이러니가 거기 있다. 그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외부로서 표현하는 까닭에 이 허구의 서술이 유효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화자는 어느 살인마가 자기 자신을 살해한 후에 하는 행동을 여전히 이어 서술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주변 인물이 이후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 자신의 ‘자아’를 상실하지 않고 1인칭의 관점에서 서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해당 시제에서 화자는 이미 사망하였으며, 그는 허구 자체와 괴리된 채 자기 자신의 서술을 이어가는 것이다. 일종의 유체 이탈 화법으로, 그는 스스로 죽은 자신을 ‘타자’화 하여 거리를 둔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내부’는 분할된다. 죽은 자신의 ‘내적’ 삶은 서술하는 ‘내적’ 삶과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다. 그 순간 그는 ‘타자’이며 ‘자아’다. 어쨌든 거기서 둘은 양립한다.


_

수요일 연재
이전 06화2. 짤막한 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