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
이 악화일로의 역사는 시간과 아울러 누적되며, 그리 최초를 숭앙하는 그는 기실 그 숭앙의 역사 속에서 점차 그 숭앙의 출발점이 제 3자로서의 ‘타인’을 인식하기 싫어서 그랬다는 걸 잊어간다. 그는 믿기 시작한다. 그 자신의 모순은 그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일시적인 논리의 도약>이며, 그가 그의 사명을 일단 관철해 두면 후일 재능 있는 누군가 채워줄 수 있을 무엇이라고. 그는 ‘오해’ 속에서 ‘사명’을 완수하는 주인공이고, 언젠가 나타날 뛰어난 ‘조연’이 이 ‘오해’를 바로잡아 줄 수 있으리라고. 그는 스스로 만들어낸 ‘사명’이 시대가 그에게 부여한 무엇이란 것이라 믿을수록, 사실 그 ‘사명’이 제 3자로서의 ‘타인’으로부터 도망친 ‘증상’ 중 하나라는 것을 잊을 수 있다. 그에게 세계는 언제나 두 가지 부류로 구성되며, 그는 때때로 아이의 역할을 맡을지언정 궁극적으로는 어른스러운 부모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비극으로 자랑스럽게 자신을 늘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고 스스로 <가학자>가 되고자 한다. 그는 언제고 스스로 <가해자>가 되고자 한다. 만일 그가 <피해자>를 언제고 자청하더라도, 그건 일시적인 전투에서일 뿐이고, 전투가 아닌 전쟁에서 그는 스스로 <가해자>여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는 <승자>여야 직성이 풀린다. 그는 <승자>고 <주인공>이며 <가학자>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승자>이기 위해 <패배자>를 모집한다. <피학자>를 모집한다. 바로 이 <모집>을 통해 그는 <승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는 판을 원하고 짜고자 한다. 그는 <주인공>이기 위해 <조연>과 <단역>을 모집한다. 그는 <주인공>이기 위해 <연극>을 기획한다. 그렇게 그는 <패자>라는 제물을 원하고 또 찾아다닌다. 그가 <인간적>이기 위해 그는 <비인간적>인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의 <원한>은 그의 <억울함>에 기인하고, 그의 <억울함>은 그 자신이 <주인공>인데 세상이 몰라주는 데서 기인한다. 그의 <비극>은 이중으로 <연극>적이다. 그는 <주인공>이기 위해 <연극>을 기획하고자 하는데, 바로 그 연극을 세상이 하나의 현실로 승인해 주지 않은 까닭에, 바로 그 거절이 그의 <비극>이라는 <연극>을 좀 더 심층적으로 종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바로 그것이 <반고흐>가 <양극성 장애>일지언정 <연극성 인격 장애>일 리는 없는 까닭이다. 자기 작품에 몰두하는 인간과, 평판에 몰두하는 인간은 그 양상을 달리하는 까닭이다. 전자는 공간을 ‘사용’하여 선들을 모아 작품을 산출하는 데 반해, 후자는 평판의 주체로서 관객과 배우의 2자 관계의 짤막한 선을 벗어난 적이 없는 까닭이다.
그의 세계에서 그는 언제나 <승자>여야 하듯, 가장 <인간적>이어야 하며, 가장 <도덕>적이어야 하는 방식으로 가장 ‘좋은’ 모든 것들에 이입하고 동일시하며 스스로 ‘내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나쁜’ 모든 것들을 ‘투사’하여, 힘껏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