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짤막한 선 (2)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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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아이의 저 ‘발달’에의 역사에서 제 3자는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이미 있던 현실을 ‘발견’하지 않고자 노력할 뿐 아니라, 기실 그것이 ‘발명’이라고 끌어내리려는 자의적이고도 인지부조화적인 정치적 시도에는 그저 제 3자에게 ‘자아’가 침해받으리라는, 그러니까 자기 거짓말이 마침내 어디선가 검증받으리라는 거짓말쟁이 특유의 불안이 숨겨져 있다. ‘현실’ 또한 혹자의 발명품 정도에 그치기를 바라는 까닭에, 그러므로 자신의 현실은 제 3자의 현실과는 다른 현실이며 따라서 현실 인식의 여부는 ‘필연성’의 문제가 아니라 ‘의견’의 문제라는 ‘의견’의 ‘발명’과 저 ‘과잉된 적용’은, ‘현실’과 상관없이 그저 모든 것을 ‘발명’이며 ‘의견’인 ‘정치’의 문제로 끌어내리려는 ‘응석’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온 힘을 다해 제 3자를 잊고자 2자 관계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언젠가 자신의 일부라 믿었던 혹자가 사실 타인이라는 사실이야말로 궁극의 깨달음 정도인바. 그는 바로 그 2자 관계에 천착하는 것이다. 그는 바로 그 ‘보호자’라는 관계 양상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절대적이고 싶은 관계는 <부모와 자식>에서 <스승과 제자>로 번역되었다가, <선각자와 일반인>으로 번역되고, <위인과 일반인>으로 번역되다가, <사명 있는 이와 사명 없는 이>로 번역되다가 어느 날엔가 <주인공과 그 주변인>으로 번역되기에 이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선은 기실 <승자와 패자>를 거쳐 <가학자와 피학자> 따위에 영원히 그치지 않겠는지.


그의 선은 끊어진 선이다. 그의 선은 그 자신의 최초의 자아로서 은유되는, 저기 저 찬양되곤 하던 유년기 최초의 시원적 ‘기분’으로서의 ‘점’의 두께 따위에 다름 아니지 않겠나. 그 선의 길이는 그 점의 두께 따위에 영원히 그칠 양이며, 선으로 치면 바로 그 시원?적 ‘점’의 두께 너머의 길이에 있는 선은 영원히 볼 수 없는 끊어진 선의 한계 위에 있을 테고, 따라서 면이란 도무지 무엇인지, 공간이란, 그러므로 입체란 무얼 의미하는지는커녕, 면 위에 새겨진 그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그저 두꺼운 점이 스스로 선이라 주장하는 이상으로 아무것도 없는 채 죽을 운명인 것이다.


그에겐 저 무한하고 무수한 곡선과 직선들뿐 아니라 저 모든 면과 심지어는 ‘공간’들까지도 모조리 한계 지어진 ‘짤막한 선’ 따위로 번역되지 않겠는지. 그에게 모든 사건은 <승리> 아니면 <패배>일 테고, 모든 역할은 <주인공> 아니면 <조연> 아니겠는지. 그는 유년기 <보호자>와 동일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가학자>적인 면을 과시하겠으나, 또한 자랑스럽게도 스스로의 <유아>적인 면모를 활용하며 <피학자>를 모집하며 서로를 연민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영원히’ 연민하기도 할 터다. 세계는 깔끔하게 가해자와 피해자로, 선각자와 어리석은 자로,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한 인간과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인간으로, 또 어른스러운 연민과 철없는 이기주의로, 순수한 천진성과 속물들로, 그리하여 흑과 백으로 마침내 ‘영원히’ 나뉘는 것이다.


흑과 백으로 이미 결론이 정해진 저 한계 지어진 짤막한 선의 세계에서, 이미 주인공으로 정해진 자는 틀릴 수가 없으며, 만일 틀렸다고 세상이 말한다면 주인공의 자리가 바뀌는 게 아니라 장르가 바뀔 뿐이다. 이제 장르는 희극에서 비극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는 그 짤막한 역할극 내에서 명칭만 바꿔가며 모순을 극복한다. 방금 그가 언급하던 흑과 백에서 ‘백’은 <어른스러운 연민>을 가진 사람이었고 ‘흑’은 <철없는 이기주의자>였는데, 이제 다시 언급하는 ‘백’은 <순수한 천진성>을 가진 이고 ‘흑’은 <저잣거리에 오염된 속물>이 된 것이다. 그는 인지부조화와 해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기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주인공’인 까닭에 ‘합리화’가 아닌 ‘극복’이며, 바로 이런 방식으로 ‘개념’보다 ‘뉘앙스’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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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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