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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최초의 인식’은 기억에 자신을 기록할 여력이 없다. 그는 ‘기억’도 ‘기록’도 ‘자신’도 모르는 까닭이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된다손 친다면, 최초의 점은 기실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에 그저 점에 불과하지 않던가. 그 점은 그 순간 하나의 세계이며 모든 세계에 다름 아니지 않겠나. 완전히 통일된 세계로서의 비대한 자아를 가진 최초의 아이는, 그러니까 아직 점으로서의 자아만 가진 단계의 아이에게 그 자신의 자아로 가득한 세계는 곧 자아가 없는 바와 무엇이 다르겠는지. 혹자가 옆 사람을 꼬집어도 그 자신이 고통스러워진다 여길 양으로. 그의 세계는 자기 자아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자아가 곧 세계이며, 따라서 세계는 자기 자아가 미치는 정도 따위에 불과할 테니. 그러나 그 자신의 세계가 그 자신의 자아에 그치는 경향 위에서 살아간다는 바로 그 점이, 누구든 거기서 탄생해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지 않나.
그러나, 다시, ‘최초의 인식’은 기억에 자신을 기록할 여력이 없다. 그는 ‘기억’도 ‘기록’도 ‘자신’도 모르는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그 최초의 ‘자아’는 살아갈 여력도 없으리라. 따라서 그가 발견하는 최초의 타인은 누구인가? 그 타인은 그 자신의 보호자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보호자는 타인으로서 새로이 발견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부라 믿었던 대상이 기실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인지부조화에서 발견되는 ‘타인’에 다름 아니다. 그런 까닭에 보호자로서의 타인은 점으로서의 자아에 균열을 새기고, 그 최초의 점을 분리함으로 점과 점의 연결로서의 선이 비로소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그저 갈라졌을 뿐, 그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 최초의 선을 구성하는 두 번째 점으로서의 ‘타인’이 기실 첫 번째 점의 일부였던 까닭에. 그가 그저 ‘점’에서 ‘선’으로 나아갔다는 증거로서 ‘선’의 ‘길이’라는 <상호 간의 관계>는 애초부터 전제된 저기 저 ‘최초의 점’의 두께와 다를 바가 없는 까닭에, 그는 익숙한 ‘자아’라는 요람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셈이다. 최초의 ‘점’으로서의 요람, 그리 흉흉하고 게으른 의도로 과대 평가되곤 하는 시원적 ‘기분’으로서의 요람 따위에서.
비로소 그는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일부라고 믿었던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기원이 자기 자신과 같다고 여겼던 대상이 기실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분열’에 관한 <발달>적 깨달음 너머에서 그는 이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타자’로서의 ‘타인’을. 제 3자로서의 타인을. ‘자아’ 바깥에도 세계가 존재하므로, 고립을 구현하던 그 자신의 ‘자아’는 조금도 완전하지 않으며, 폐쇄되지도 않고 또 그럴 수도 없으며, 그리하여 바깥의 공기를 한 줌도 들이마시지 못하면 죽고 만다는 것을. 이른바, 제 3자의 발견이 ‘발명’이 아닌 ‘발견’인 것은, 그 자신의 ‘자아’인 최초의 ‘점’이 존재하기 아주 이전부터 저 제 3자라는 ‘공간’은 이미 거기 있었던 까닭이다. 그의 ‘존재’는 조금도 선행하지 않았으니, 그는 자신의 ‘존재론’을 전개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제 3자를 발견하는 ‘발달’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의 ‘존재’는 저 공간이라는 무수한 ‘선’들의 가능성에, 그러니까 무수한 ‘관계성’의 가능성에 기반하는 교차점 따위 정도에 불과하다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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