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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익숙한 ‘자아’의 탄생 이후, ‘자아’ 바깥은 다 미지의 세계인가? 얼마나 미지의 세계인가? 문제는 ‘자아’의 탄생 여부가 아니라 ‘자아’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태도를 그 누가 강화하는가다. 그야말로 듣기 좋은 소리. <당신의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곧장 “그러니까, 외부의 지식을 습득하거나 적응하려는 노력은 할 필요 없다”는 문장을 묵음 처리해 전달하고, 이어 새로운 목소리를 내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앞선 문장을 묵음 처리로 전달하고 난 이후에. “외부 적응을 위한 노력을 통해 변화할 필요 없이”, <당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하고.
‘자아’로의 도피는, 기실 무수한 논증 끝에 도달하는 ‘자아’라는 추상 개념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익숙한 과거”로써의 ‘자아’로의 도피인 까닭에, 그가 도피한 ‘자아’의 풍경은 내면의 풍성한 세계가 아니라 동어반복의 쳇바퀴일 텐데. 거기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대상보다야, 그가 이미 알고 있으나 그의 의식이 아직 모른다고 주장되는 무엇이 더 많이 반복될 텐데. 그처럼 그의 의식이 아직 모르지만 그의 무의식이 이미 알고 있다고 주장되는 저 흔한 지식의 대표 격으로는 소위 ‘인간성’이 있으리라.
의식과 무의식의 ‘시원’에 있는 <기분>,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최초의 정념을 이해하면 추후 인간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이다. 저 ‘시원’이란 최초를 의미하는 단어로써, 물리적인 시간의 개념을 형용사적으로 으스댈 수 있게 추상화하는 특성을 지닌다. 저 시원적 기분은 자기 내면을 탐구하는 모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의 지표로서, 어쨌거나 아동심리 전공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자랑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지 않겠는가.
다 같이 무의식을 탐구하자! 외치면서, 노력하지 말자는 말을 묵음 처리하는 것. 외부 노력은 너무 비인간적이니, 내면의 인간성을 탐구하면 무의식의 지식이 우리에게 국어, 영어, 수학을 뛰어넘는 더 중요한 지식을 알려줄 테고, 그 순간 나머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식 없이도 살 수 있는 깨다~알음의 교주 자리가 우리에게 놓일 것이다. 차후 우리와 같은 희생양이 우리에게 우리가 <거느릴> 사제라는 제물로 주어지지 않겠느냐는 식인데.
그렇게 친숙하고 익숙한 과거를 영영 탐닉하며, ‘자아’라고 자의적으로 호명하는 단출한 과거를 영영 파먹는 식으로 수행되는 동어반복은 무수하게 응용되는 인간성이 아니라, 시원적 기분으로서의 있는 그대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인간성’을 가정할 뿐만 아니라 숭배하지 않겠나. 아무래도 ‘노력’하기 싫은 만큼 숭배할 텐데. 어쩌면 거기 도취되어 보다 ‘더’ 숭배할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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