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성의 탄생 (2)

by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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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슬프게도 저 논거들은 그의 내면에서 스스로 솟아나지 않았다. 저기 저 내면 마케팅은 외부에서 왔다. 저기 저 머나먼 외부로부터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내면을 보라, 오직 거기에만 답이 있다!” 하는 식으로.


그의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다는 주장 자체는 그의 무의식으로부터 오지도 않았고, 그의 의식으로부터 오지도 않았으므로, 그 자신으로부터 오지조차 않았다. 저 늠름한 주장은 외부로부터 왔다. 저 주장이 외부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그의 무의식은 아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의식은 알고 있을 터다.


외부로부터의 저런 익숙한 주장이 그의 의식을 설득하는 방식은, 저 외부가 수행한 주장이 실은 그의 내면의 무의식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며, 그저 저 외부는 그것을 일깨워 주었을 뿐이라는 식일 텐데. 그 자신의 무엇보다 미지의 내면을, 스스로의 의식도 알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의식을 무려 외부인의 의식이 열어 밝히는 것이다. 여기, 두 가지 의문을 품을 수 있으리라.


외부인 얼마나 숭고하며 어마어마한 목적을 가지고 있길래, 또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길래, 저기 저 뻔하디뻔한 모순을 무릅쓰고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내면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또 한 가지는, 어째서 저 누구나 알만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저 목소리를 혹자는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다. 기실 후자의 의문은 아무래도 울고 싶은 아이의 뺨을 때리는 현상과 유사할 모양이다. 기실 외부의 저 목소리가 지껄이는 주장이, 내면의 내 ‘무의식’이 아닌 ‘의식’이 지껄이고 싶은 주장과 일치해서가 아닌가?


어린아이에게 낯선 세계는 정보의 바다이고, 그 자신의 익숙하고 좁은 ‘사’적 세계는 친숙할뿐더러 저 낯설고 이질적인 무엇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방패가 될 수도 있으리라.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저 낯선 세계가 그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지식을 익숙한 지식으로부터 연역하여 습득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 자체가 가져오는 ‘스트레스’가 있는 것이다. 낯선 세계는 적응이나 공부에 관한 ‘노력’을 종용하겠으니, 그는 고통스럽게 낯선 세계 속에 있다가도 익숙한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에게 낯선 세계라고 무조건 ‘공’적 세계는 아니겠으나, 어쨌든 익숙한 세계는 ‘사’적 세계가 아니던가. 그는 누군가 ‘사’적 세계를 침범한다면 월권이라 하겠으나,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저 세계의 일부일 뿐이리라.


따라서, <당신의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다>는 주장이 정당화해 주는 건 <외부 세계를 학습하지 않아도 된다>는, 따라서 ‘이질적’ 세계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허용이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삶을 반복하더라도, 아주 미묘한 차이라도 발견할 수밖에 없다. 영영 내가 아는 그 땅에서 나만 아는 것 혹은 나만 안다고 주장하는 것을 지껄이며 <으스대며> 살 순 없을 테니까. 비극인가? 전혀 비극일 리 없다. 그저 사실이 그런 게 아니겠나. 그러니 그는 언젠가 자기 ‘자아’로부터 나와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언제고 그 ‘자아’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자아’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기 위해 오늘도 저 외부의 목소리에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당신의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다음 목소리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것을, 당신이 ‘의식’이 ‘아직’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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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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