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우리 인식은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면, 새롭게 알게 된 걸 우리 자신에게 설명할 수도 없다. 새로운 지식은 기존 지식으로 설명되며 편입되는 까닭이다. 낯선 것은 그렇게 아는 것이 된다. 따라서, 알고 있는 것에서 연역할 수 없는 것은 영영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아는 모든 것의 시작은 무엇인가? 우리 연역의 최초에는 무엇이 있는가? 물론 이에 손쉽게 ‘자아’라고 대답할 수도 있으리라. ‘나 자신’이 최초에 있다고. 그러나 우리 자신의 ‘자아’인 ‘나’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 ‘자아’나 ‘나’라는 개념 혹은 이미지 따위도 언젠가 어느 날 인지적으로 학습한 무엇일 따름이다. 나아가, ‘최초의 인식’은 기억에 자신을 기록할 여력이 없다. 그는 ‘기억’도 ‘기록’도 ‘자신’도 모르는 까닭이다.
분야로 치자면, 누구나 일단의 관심 분야 외에는 알지 못하고, 바로 그런 까닭에 새로운 분야를 접할 적 그에 접근하든가 미지로 남겨두든가 할 텐데. 새로운 분야의 정보가 무수히 쏟아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그 무수한 정보 중에서 이미 아는 것에 이웃해 있는 몇몇을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알아듣지 못하는 대다수 미지의 것에 반해, 자기 자신의 인식의 범주를 방어적으로 맞세우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학습하기 싫고, 그 학습을 종용당하기도 싫으며, 따라서 학습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지식의 홍수 또한 부정해 버리고 싶은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짧은 순간 너무 많은 해석에의 ‘노력’을 종용당하여 마침내는 바로 저 ‘노력’ 자체를 혐오할 수밖에 없는 심리 상태에 처한 셈이다. 관리 가능한 범주를 벗어난 스트레스가 그에게 저 모든 지식을 부정하도록 종용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는 저 무수한 정보 중에서 이미 아는 것에 이웃해 있는 몇몇까지도 도매금으로 넘겨 부정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 자신이 이미 익숙한 무엇조차 그에겐 일종의 적대적인 지식의 간자로 보일 지경인 셈이다.
그가 매달리고 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아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안다고 알려진 것들뿐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매달릴 뿐 아니라, 혹자가 그를 설득하기로 아직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는 무엇이 있다고 한 바로 그것에 매달리는 것이다. 여기, 이미 알고 있는 지식 외에, 그가 알고 있으나 자기 자신이 알고 있다고 인지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말한 지식은 과연 무엇인가? 흔히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는 다름 아니라 인간 ‘무의식’이 가진 지식이며 바로 그것이 무수한 소위 도시에서 흔히 전염되어 신앙되는 ‘신’의 이름일 터다.
요컨대 이런 식이다.
<그의 무의식은 알고 있다. 다만 그가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의 무의식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그의 의식은 모른다. 따라서 그의 의식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의 무의식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는 “외부”의 정보를 취득할 필요가 없다. 스트레스받으며 “연역”할 필요도 없다. 그의 무의식이 모든 걸 알고 있으므로, 그의 과업은 그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그 자신의 의식을 설득하는 일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답은 “내면”에 있다.>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