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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파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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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 May 24. 2024

34 그것

시즌 4 HOW

삶의 행간에서 스스로 가공을 거칠 때 혹자가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애를 쓴다면, 다른 누군가는 이점을 강화하는 데 시간을 쏟을 양이다.

허나 그렇게 가진 결함으로 인해 팔방미인이 될 순 없다손 치더라도, 어디까지나 감당 가능한 결함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오직 이점만 생각할 순 없으리라. 최소한의 양식이라는 한계는 그렇게 종종 규범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우리를 압박하곤 한다. 그럼에도, 강제되었든 아니든 나름의 노력에 그 한계가 언젠가 도래하기 마련 아니던가. 노력에 비해 결과가 더딘 어느 지점에 대해 하염없이 세월을 낚던 어느 날, 익숙한 이점은 도무지 당연한 반면 도저히 메워낼 수 없는 무구한 이 결함은 비로소 어떤 선망을 도래하게 할는지 모를 일이기는 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소위 ‘개성’이라는 덫 위에서 삶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기는 한 모양이다. 한편으로 어떤 재능은 삶을 손쉽게 만들어 줄 수도 있겠으나, 그리 손쉬우면 손쉬울수록 어쩌면 당사자에게 가진 재능을 발휘하는 일은 일종의 ‘타협’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 않겠나. 그리 잘하는 일에 이끌려 서두른 타협은, 잘하지 못하는 무엇과 관련된 무수한 생태계들을 불편한 블랙박스로 잠가놓는 심리적 사건을 쉬이 동반할 수도 있겠다. 요컨대 재빠른 타협과 채 익지 못한 인내심은, 소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성역’을 너무 일찍 도래하게 하는 나머지 끝끝내 그를 도피성만 떠돌게 하는 관성 내에 종종 가둘 양이다.

반면 잘 하지 못하는 일에 관한 사로잡힘은, 그러니까 그가 그토록 쉬이 거기 깊이 사로잡히곤 할수록, 그리 잘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자신에게 소위 ‘매력’으로 작용할수록 이는 그가 불편하게 꼬인 매듭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어떤 패턴을 증언하는 셈이리라. 거기엔 어떤 지불유예가 계속하여 기다리는 중이다. 제약 없는 숱한 기다림들, 응답 없는 도전들이 보상을 유예하는 과정의 부산물로 어떤 참을성이 거기 자리한다.

그리하여 자기 노력의 무수한 잉여 부산물들이 매번 그를 절망으로 메다꽂았을 모양이다. 낭비된 시간과 노력 사이에서, 그의 ‘개성’은 영락없이 ‘덫’으로 자리매김하였으리라.

반면 타협 위 도피성은 어떠한가? 그에게 ‘개성’은 덫과 그토록 무조건적 동의어가 되진 않을 터다. 어쩌면 그는 함정(블랙박스)에 빠진 적이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리 함정을 마주한 적도 또 함정 내부를 살펴본 적도 없거나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이를 애써 잊었다고 할 수 있겠으니. 그렇게 그는 저 멀리서 굽어보며 저기 불편한 블랙박스 너머는 ‘아마도’ 고통스러울 양이라 짐작만 할 따름이리라. ‘“굳이” 이 블랙박스를 알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필요 이상의 편집적 욕망 아니던가? 따라서, “굳이” 이를 다 알아야 하나? 잘하는 일에만 집중하기에도 벅차지 아니한가? 하며 스스로 암시하여 오랜 세월 피해 왔던 함정으로부터 재차 도피하곤 하는가 보다.


그러나 도래하는 문제는 도피 자체가 아니라,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다시’ 도피다.


이미 완전히 포위된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살고자 항거(직면)하겠으나, 에워싸인 포위 속 한 줄 소박한 퇴로라도 주어졌다고 믿는 다른 이들은 그 병목에서 저들끼리 압살당하거나 등 뒤를 공격당하거나 어쨌거나 그 희망 어린 소박한 길에만 매달려 온통 순교하기 마련 아니던가. 요컨대 저기 저 순교가 제아무리 자랑스럽더라도, 따라서 ‘사명’이라는 유사 퇴로를 사후적으로 제아무리 열심히 호소하더라도, 어쨌거나 저 도피(를 ‘부정’하고자 애쓰는 ‘다시’ 도피)의 와중엔 ‘인내’보다야 ‘충동’이 훨씬 더 많이 발견되지 않겠나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무한한 지불유예로 스스로 영영 걸어갈 순 없을 양이다. 그 가혹한 풍경은 목적지를 약속하지 않는다. 아이가 아침 운동을 ‘매일’할 적엔, 날마다의 짧은 목표가 매번 다시 더 멀리 생기고, 또 새로 생긴 목표가 더 멀어지고 멀어지다 끝내 사라져야 이를 지속할 수 있다. 그는 이 무의미를 긍정하기 위해, 어쨌거나 어떤 지긋지긋함을, 어떤 좌절을 미리 가져와야 하는 셈이다. 그가 특정한 성취가 아닌 어떤 꾸준함에 대한 태도만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승패에 관련 없이 지겹고 외로운 탐사를 죽기까지 영영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실패’를 미래로부터 끌어와야 한다. 그리 미리 끌어온 실패마저 언젠가 가짜라고 밝혀질지언정.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무한한 지불유예로 스스로 영영 걸어갈 순 없을 양이다. 그 가혹한 풍경은 당사자에게 그 무슨 성취도 미리 부정하길 명령하는 까닭이다. 아군의 머리가 잘리듯, 그리 뿌리 의미들이 그토록 덧없이 잘려가는 까닭이다. 가설을 더 멀리 세울수록 덧없어지는 삶은 그 자신의 정신을 어떤 낙담으로까지 이끌어낼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양이다. 그토록 공허한 삶이 진실이건 아니건, 분명한 건 누구도 처음부터 이를 견뎌낼 수야 결코 없다는 사실이리라.


과연 언제까지 저 진공상태를 견뎌야 하나? 우리는 이 해결 불가능한 낙담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앞으로도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거듭 이 진공상태 자체를 헛되이 ‘부정’하고자 애쓰곤 한다. 혹은 ‘보복’하고자 한다. 순간의 충동들로 항의하곤 한다. 삶 속의 이 사랑이, 이 약동이 과연 무의미하느냐고. 삶의 이 약동들이 무얼 이야기하고 있느냐고. 분명 이 힘이 무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끝내 인간은 종교와 만날 수밖에 없다던가.


그러나, 저기 저 생의 약동들을, 고로 저 무수한 힘들의 집합을 집어들고 하는 이 항의가, 공허한 삶 자체에 대한 이 보복 시도가, 또한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공허하지 않나. 나아가, 삶의 약동하는 힘이 어쨌건 간에, 삶이 살아가기에 공허한 딱 그만치 (자의든 타의든) 삶을 굳이 끝내는 일 또한 실로 공허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삶을 가공하는 일 또한 공허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가공’을 통해서 이 진공상태에 도달했고, 되떨어졌다가도 다시 또 여기 이 공허에 기어이 도달할 수 있을 모양이다.


곧, 과연 저기 저 파도치는 충동들 중 무엇이 ‘자아(나)’인가? 하며 의문을 품을 적에, 그러니까 과연 저기 저 극단적인 감정들을 통제해야 한다면 통제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하며 상념에 잠길 적에, 따라서 이성(대상)으로 감정들을 통제한다고 했을 때 당 이성 또한 이 통제를 통해 어떤 목적지(감정)를 겨누고 있지 않던가? 의문에 잠길 적에, 충동은 당연히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이성도 아닌 어떤 ‘중심’을 스스로 가정하고 있지 않나? 하며 재차 가설을 세우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도 몰래, 주체도 대상도 감정도 이성도 아닌 “그것”이, ‘감정’의 파도에 삼켜지지 않은 채 ‘이성’을 도구 삼아 홀로 떠 있지 아니하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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