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인간의 설득력은 소위 인간적이라는 낙인에서 온다. 그것이 논리보다 은유가 그토록 자주 더 설득력 있는 이유가 아니던가. 우리는 그렇게 가장 친숙한 것에 빗댄 설명만을 쉬운 설명으로 간주하곤 하므로. 가까운 존재(체질)론으로 만사를 환원하면, 낯설고 불편한 ‘경계’는 세상에 없는 양, ‘경계’ 너머는 존재가 아닌 양 보인다. 매혹적인 은유는 낯선 것들을 친숙한 양 속삭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리 친숙하고 아늑할 수 있는데도 낯설고 불편한 바깥을 택하는 건 혹자에겐 어리석은 일일 모양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째서 바깥으로, 저 불편한 낯섦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거기에 그게 무슨 종류건 간에 어떤 유효성이 있는 까닭이리라. 유효하다는 건 이미 그게 진실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증거겠고. 따라서 소위 ‘진실(정확성)’은, 그러니까 ‘현실 인식’은 그 자체로 과정의 고통을 감수하게 할만하지 않던가. 오직 거기에만 ‘삶’이 있는 덕택으로.
은유와 진실 각각의 매혹이 양쪽에서 우리를 끌어당긴다. 둘 중 우리 욕망은 주로 어딜 향하나? 둘의 통합은 일어날 수 없던가. 기실, 단박에 세계를 종합하는 설명이 주로 매력적인 건, 저 둘을 통합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까닭일 터. 물론, 못 할 것도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저 때에 따라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을 양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든 은유, 진실, 종합은 각각 나름의 매력을 호소할 터다.
그러나, 진실을 기준으로 그 정의의 범위를 더 넓힐 수도 있다. 우리가 유효하지 않은 [상상]을 [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필연적인] 까닭을 구명하는 순간, 그 설명 자체는 최소한 그 목적엔 유효할 테니. 물론 어떤 설명이냐에 따라, 입맛에 쓸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으리라. 여기 이 설명의 유효성은 무수히 나뉘어 ‘다시’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더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미사여구로서의 유효성과, 치료나 변화와 같은 [더 짙은] 필연성을 토대한 유효성으로. 또 그 둘을 통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미사여구로도.
말하자면, 미사여구로서의 은유, 그리하여 어쩌면 얼마간 인간적인 은유 등의 이 친절한 환원은 독자에게 낯섦 자체를 ‘인간’으로 환원하고, 종국에는 독자 자신으로 환원(동일시)해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저 친절하기[만] 한 작가는 그저 독자로 하여금 우선 그 자신과 악수하도록 허용하기[만] 하는 작가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관철되는 한에서 웹서핑을 하고, 바로 그러한 의도 위에서 질문을 던지곤 하지 않던가. 답을 정해놓은 질문은, 우리가 우리 앎에 속해 있는 한에서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허나, 과연 그 누가 자랑스럽게 거기서 벗어났다 고백할 수 있을 양인가? 우리의 앎은 질문의 범주를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벌써 구획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주제에 관한 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조차 없는 덕택이다. 그리하여 질문의 한계는 자기 앎의 벼랑에서[만] 비로소 지휘될 수 있다.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사태 자체는 삶 전반을 삶 자신이 자의적으로[만] 구획하도록, 그리 자기 세계를 되파먹으며 그렇게 자의적 자랑스러움 속에서[만] 살도록 하는 불가능한 [환각(투사)]적 기획을 우리에게 권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앎의 벼랑은 보다 바깥, 그러니까 무수한 시행착오의 실천에서[만] 발견된다. 그리 발굴된 우리 무수한 시도들은 차후 각각의 과거이자 기호가 되어 우리 정신적 추론의 매개가 되는 등의 방식으로 마침내는 발상의 재료가, 나아가 삶 자체가 되기도 한다. 거기 지와 무지의 경계에는 어떤 시행착오들이, 시행 없이는 거쳐 갈 수 없는 기호의 사다리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영영 분열하며 대기하는 중일 모양이다.
이런 디딤대는 발을 내밀지 않고서는 도저히 (결코) (미리) 알 수 없고, 우리 앎은 그와 같이 한 켠의 필연성과 다른 필연성 사이의 어떤 무풍지대에서 뭔가를 ‘본의 아니게’ 좇는 여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본의 아니게’ 발견하는 건 예상할 수 없기에 미리 반론할 수도 없어야 하는, 고로 [원하는 바로 그 결과]가 [결코] 아니라는 특색을 지닌다. 운명을 긍정한다는 게, 긍정할 만한 것들을 긍정하는 게 아니라 바로 저와 같이 ‘본의 아닌’ 결론들[만]을, 오직 그것들만을 긍정한다는 이야기라면, 우리가 우리 앎 밖으로 나아가는 예의 디딤대는 어떤 의미에서 폭력적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를테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만이, 예컨대 질투에 빠진 개인이 상대방에 대해 상상하고 추론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지독한 정념에 휩싸이는 바와 같은 저 ‘폭력’‘만’이 ‘비로소’ 우리를 언제고 자기 앎(동어반복) 바깥(생각)으로 밀어내지 않던가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앎’을 전제로 우리 자신의 앎에 그 바깥을 이어 포섭하고자 저기 저 디딤대에 스스로 발을 얹는 건, 기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폭력’으로 내모는 일이기도 할 양이다. 허나, 우리 자신이 이미 아는 앎만을 반복하는 동어반복(체질)의 얄팍한 권태를 벗어나는 것만이 ‘사유’라 규정한다면, 사유는 이미 그 자체로 ‘오직’ 폭력이라 할 만하지 않나. 우리 삶은 저기 저 ‘폭력으로서만의 사유’의 연속 그 자체일 양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에겐 땅뿐 아니라 그 너머의 관객들, 심지어는 걸어야 한다는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맥락의 압력 자체가 이미 하나의 ‘폭력’이고, 비로소 그 ‘폭력’에 내몰려 하염없이 걷기 위한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고민을 동반한 예의 폭력적인 시행착오의 ‘실천’ 자체가 오직 ‘사유’이자 [삶]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