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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은 색이 아니다 3

흑과 백 사이에 내가 있었다

by 이재우

세상이 요구하는 '명확함'에 대한 피로


"그 영화 어때?"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나를 향해 물어왔다.

나는 잠시 멈췄다. 어땠냐고? 재밌었나? 재미없었나?

내 머릿속에서는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웃긴 장면도 있었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감동적이었지만 뻔한 스토리이기도 했다.


"음... 그냥 괜찮았어."

어머니는 그런 대답을 하는 나를 보며 "넌 다 괜찮다고 그러더라“

어미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언제나 선택을 강요한다. 좋아요 아니면 싫어요, 찬성 아니면 반대, 성공 아니면 실패. 마치 모든 것이

이분법으로 나뉠 수 있다는 듯이, 모든 감정과 생각에 명확한 라벨을 붙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SNS를 보면 더욱 그렇다. 하트를 누르거나 누르지 않거나. 공유하거나 무시하거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며 댓글을 달라고 하는 게시물들. 사람들은 단호하게 답한다. "완전~!!!" "전혀 아니에요!" 회색 지대는 없다. 애매한 감정은 용납되지 않는다.


예술가로 사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예술가들이 있고 그들은 마치 공작새처럼 자신의 색을 뽐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그 사이에 있다. 검정과 하양 사이의 어디쯤 무채색과 색의 중간쯤에


회사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안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상사가 묻는다. 동료들은 하나둘 의견을 낸다. "적극 찬성합니다!"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온다.

"글쎄요... 좋은 점도 있고 우려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상사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명확한 답을 원했을 텐데. 그렇다, 아니다. 간단한 답을.


카페에서도, 식당에서도, 옷가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뭐가 맛있나요?" "이거 어때요?" 질문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나는 항상 머뭇거린다. "음... 잘 모르겠어요." "둘 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그냥... 적당한 걸로요?“


점원들의 미소가 조금씩 굳어간다. 답답하다는 듯이. 결정하라는 듯이. 확실히 하라는 듯이.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뭐가 되고 싶어?" "어떤 과목이 좋아?" "누가 더 예뻐?" 어른들의 질문에 나는 늘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다. 그러면 어른들은 답답해했다. "생각이 없구나." "좀 더 확실히 해봐."

확실하다는 게 뭘까? 의심의 여지없이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것? 흔들림 없이 선택하고 후회하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 나에겐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자연스럽지 않다. 억지로 만들어낸 감정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음식을 묻는다면? 나는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 어떻게 하나만 고를 수 있을까?


좋아하는 계절은? 봄의 새로움도 좋고, 여름의 활기도 좋고, 가을의 차분함도 좋고, 겨울의 고요함도 좋다. 각각 다른 매력이 있는데 왜 하나를 선택해야 할까?


이런 나를 사람들은 우유부단하다고 한다. 결정장애가 있다고 한다. 자신감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세상이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명확함이 나에게는 없을 뿐이다.


흑과 백 사이에는 무수한 회색이 있다. 진한 회색, 연한 회색, 푸른빛이 도는 회색, 따뜻한 느낌의 회색. 그 모든 색들이 다 다르고, 다 의미가 있다. 나는 그중 하나다. 검정도 하양도 아닌, 나만의 회색.


그런데 세상은 그 미묘한 차이들을 알아봐 주지 못한다. 그냥 "회색"이라고 퉁쳐버린다. 애매하다고, 불분명하다고. 마치 그게 잘못된 것인 양.


문득 피곤함이 밀려든다. 이런 명확함에 대한 요구가. 모든 것에 즉석에서 확실한 답을 내놓으라는 압박이. "어때?"라는 질문 뒤에 숨어있는 '분명히 답해달라'는 기대가.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 아니, 부응하고 싶지 않다. 내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내 생각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게 잘못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누군가 물을 것이다. "어때?" 그러면 나는 또 대답할 것이다. "음... 글쎄. 그냥 괜찮은 것 같아." 그리고 그 대답 뒤에 숨어있는 복잡한 감정들과 생각들은 혼자 안고 있을 것이다.


흑과 백 사이에 내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가 나쁘지 않다고, 점점 더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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