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기억은 어둡고 축축한 지하 방 같았다. 맑은 날 아침이면 반짝 따듯한 햇살이 반 즈음 쏟아져 들어오는 그런 지하 방처럼, 행복한 기억은 몇 되지 않는다. 나의 기억 속 아빠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집을 자주 비웠다. 이런 아빠와 숨바꼭질하듯 엄마는 열심히도 어린 나와 언니, 그리고 남동생을 데리고 아빠의 직장을 기습하거나, 아빠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늦은 밤거리를 헤매곤 하였다. 아빠의 귀가가 늦어질 때는 엄마는 종종 어린 우리들에게 아빠의 직장으로 전화하게 했다.
"안녕하세요, OOO 씨 자녀인데요, 아빠 좀 바꿔주시겠어요?"
늘 아빠의 외박 알리바이를 도와주던 동료들은 우리들에게까지는 모질지 못했고 아빠를 바꿔주었다.
수화기 너머로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합창을 했다.
“아빠 언제 와? 맛있는 거 사 와! 집에 빨리 와!”
그러나 우리의 애타는 목소리에도 아빠의 귀가는 점점 늦어졌다. 외박이 잦아질수록 어린 우리도 곧 알게 되었다. 아빠는 도박에 빠져 있었고, 끝없는 바람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남편도, 아버지도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외할머니 생신 날 외가친척 가족들이 다 모였는데, 아빠는 케이크를 사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가 끝내 연락이 두절되었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분통을 터트렸다. 엄마는 케이크를 사러 간다던 아빠를 찾으러 새벽 4시에 남동생을 둘러업고 춥고 어두컴컴한 시골길을 걸어 내려와 트럭을 겨우 얻어 타고 아빠직장까지 무작정 찾아갔다고 한다. 도박을 같이하던 동료가 아빠가 없다며 둘러대었지만, 엄마는 결국 회사 숙직실 한쪽 작은 창고에서 웅크리고 숨어있는 아빠를 찾아내었다. 수없이 반복되는 아빠의 도박문제와 외도로 매일이 괴로우면서도 엄마는 억척스럽게 꾸역꾸역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고치고 다듬었다. 늘 술래였던 엄마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아빠와의 숨바꼭질을 이어 나갔다.
아빠의 지긋지긋한 바람과 도박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엄마는 어느 날 이혼을 결심했다.
아빠의 문제를 지적하던 언니의 뺨을 후려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날 밤,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 일찍 교복과 책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라며 우리를 들여보냈다. 집 앞을 뛰어나오던 우리 남매는, 아빠가 쫓아올까 무서워 자꾸 뒤를 흘깃거렸다. 그 모습에,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자각이 번뜩 스쳤다고 한다.
당시 아빠는 외도 상대에 눈이 돌아가 그 여자의 꾐에 빠져 수천만 원의 돈을 대출받아 준 상태였고, 엄마는 이것을 핑계 삼아 이혼과 양육권을 요구했다. 당시만 해도 남자들에 친권이 부여되었다. 아빠는 친권을 양도해 주는 대신, 위자료는 물론이고 양육비도 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엄마는 악에 받쳐 맞받아쳤다.
“그럼 자식과 돈을 바꿔! 그 더러운 돈 줘도 안 받아!”
그렇게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했다.
훗날 나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엄마, 왜 그렇게 문제 많은 아빠와 결혼했어? 왜 좀 더 일찍 헤어지지 않았어?”
당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던 엄마는 엄격했던 할아버지와 큰외삼촌 때문에, 그들이 무서워 연애는 엄두도 낼 수가 없어 좋은 ‘남자’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소개로 만난 아빠는 무척이나 착했고, 남자를 한 번 만나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순진하게 믿었다고 했다. 결혼한 후, 아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엄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지켜야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만 해도 이혼녀와 이혼가정의 자식들에 관한 인식은 시뻘건 인두로 낙인이 찍힌 죄인들과 다름이 없었다. 엄마는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고. 엄마는 기꺼이 가족들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끝나지 않을 줄 알았던 숨바꼭질은 이혼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이혼 후 어떤 잔혹한 삶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엄마는 다시는 술래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