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꿈을 꾸었다. 그 꽃비 속에서 고운 꽃 한 송이가 그녀의 앞치마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그러나 꽃송이처럼 여리고 가냘프기는커녕, 나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이고 4.2킬로그램의 우량아로 태어났다.
손자를 바라던 아빠와 친가 식구들에게 나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무능했던 아빠 탓에 엄마는 분유값조차 매번 친할머니께 받아야 했고, 나는 많이 먹는다고 늘 타박을 들었다.
“네가 많이 먹긴 했다. 배가 축 늘어져서 땅에 닿아야 잠을 잤거든.”
엄마는 내가 조금 특이했다고 한다. 먹기도 많이 먹었지만, 움직임도 또래보다 빨랐다고 했다. 유치원이전에 글도 스스로 깨우쳤다. 그리고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황소고집이었는데,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곡기를 끊었다고 한다.
우리 남매가 초등학교를 다녔을 무렵, 아빠 때문에 한창 속을 끓이던 엄마는 자주 점집을 찾아다녔다.
“OO엄마야, 고산 철학관이라고 그래 잘 본다네, 우리 가보자!”
엄마는 친구에 성화에 못 이겨 고산철학관을 방문했다. 철학관은 대기실이 있을 정도로 붐볐다. 그렇게 기다려 아빠는 남편감으로는 꽝이라는 소리를 듣고 용하다 싶어 우리 남매들 사주도 보았다. 내 사주를 본 철학관 아저씨는 말했다.
“야는 외국 삼신이 들었네.”
“외국 삼신이요?”
“그래, 외국 삼신. 야는 외국으로 보내야 한다. 원래 지가 살던 곳으로. 혹시나 결혼한다고 흑인을 델꼬와도 보내야 한다. 그게 지 팔자인기라. 막으면 안 된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지만, 혹여라도 내가 외국으로 시집을 간다면 막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2013년, 나는 정말로 흑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고산 철학관에 같이 갔던 엄마 친구는 전화를 걸 때마다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철학관 아저씨가 너무 용했다며 감탄을 멈추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때도 지금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 놀라지 않으셨다.
엄마는 처음부터 내 독특한 성격을 이해해 줄 한국 남자를 찾기 힘들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할머니가 앞치마에 받아 안은 꽃은, 외국인 삼신이 앞으로 펼쳐질 내 삶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미리 내려준 작은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