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Feb 25. 2024

미학적 구조주의

différance d'art

엘름그린&드라그셋(Elmgreen & Dragset) - <화가, 도판 2>(2021)

  컵 속의 물은 컵이라는 구조로 인해서 원기둥이 될 수 있고, 얼음 트레이로 인해서 육면체가 될 수 있다. 바나나는 먹힘을 당함으로써 음식이 될 수 있고, 마우리치오 카텔란 같은 예술가에게 선택되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상어의 사체는 그걸 발견하는 사람에 따라서 샥스핀이 될 수도 있고, 박제가 될 수도 있으며, 데미안 허스트의 경우에는 포르말린에 담가서 <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죽음>이라는 작품으로 탈바꿈시킬 것이다. 결국 작품이란 그 자체로 작품이기 때문에 작품인 것이 아니라, 작품이라는 테두리(혹은 틀, 구조) 속에 그것을 규정하는 예술가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일 게다. 


  작품은 스스로 피어나는 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가 그의 머릿속에 떠도는 영감을 남긴 창작물이자, 그의 존재를 형상화시킨 즉자적 무언가이며, 관람자의 시선과 감상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 사회적인 무언가이다. 그것은 언어이며, 코드이다. 따라서 예술은 정보 소통의 과정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건 일종의 해독이다. 이럭저럭 여기에 성공할 경우 예술가의 머리에서 떠난 정보는 마침내 목표인 수신자의 머리에 도달하고, 이로써 예술적 소통은 완수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수신자가 예술언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언어'라는 것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소통이 가능하다. 같은 언어로 소통하기 위해선 같은 문자와 문법을 사용해야 한다. 


  인간이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존재인 것처럼, 결국 예술도 언어와 같은 무언가에 갇혀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있으며, 그의 주체는 사회적 규범과 양식이라는 거푸집에 의해서 형성되는 결과물이다. 그 틀을 통해서 형성되지 않은 인간은 없을 것이다. 만약 있다고 해도, 그는 비이성 혹은 타자의 영역에 속하는 제3의 세계인일 것이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연구하여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는 무의식적 구조를 언어를 통해 규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푸코는 인간학적 죽음을 논하며, 계보학적으로 인간의 형성에 대해 논했다. 그가 구조주의학파로 구분되며,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들과 반대의 입장을 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실존의 불가능성을 외치며, 주체의 불가능을 주장한 것으로 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푸코는 오히려, 그 시대마다 인간을 형성하는 거푸집을 찾아 나섰으며, 그 거푸집이 무엇으로 어떻게 형성되는지 논하기 위해서 권력과 지식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한 것이다. 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인간을 만들어내는 용광로를 연구했다. 그는 후기(1976~1984)에 인간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논하기 위해서 '주체(sujet)'라는 말을 '자기(moi)'로 대체했으며, 항상 자신의 관심사는 '주체'였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인간이라 함은 그 존재 자체로 규정되는 게 아니다. 그 인간이라 함은 사회적인 것이며, 사회적인 것은 구조적인 것이다. 문화적인 것, 법적인 것, 윤리적인 것, 미학적인 것 등 우리는 그 구조속에서 형성된 '주체'이다. 그 틀은 지극히 무의식적인 것이며, 권력과 지식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주체'를 결정짓는 이 무형의 경계선은 유동적이며, 이 시스템은 언어와도 같아서 인간에게 감옥과 같다. 


  예술도 인간과 마찬가지다. 그 존재는 윤리, 종교, 사회 등 여러 가지 규범적인 요소에 의해서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형성되며, 성립된다. 중세에 예술이란 종교라는 에피스테메 안에서만 가능했으며, 누드화는 오로지 성스러운 종교화에만 국한되어 가능했다. 종교의 지각변동, 전쟁, 학살 등 많은 것들은 과거부터 계속되어 왔으며, 그러한 요소들은 예술의 거푸집을 변형시켰다. 


  예술 또한 구조속에서 형성된 '주체'와 같은 결과물이다. 예술가들은 푸코가 했던 것처럼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보니 현대미술이 요지경이 되었나 보다. 더 이상 픽쳐레스크(picturesque)한 회화는 신선하지 않고 진부하며, 그림 같지 않은 추상화나 조각은 미술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하지만 언어라는 감옥에서 나온 인간이 더 큰 감옥을 맞이하는 것처럼, 예술 또한 그 구조를 벗어나 더 큰 구조를 맞이하게 되었다. 새장을 열고 나가면 더 큰 새장 안에 있으며, 이 끝없는 해석학적 순환의 끝은 예술의 종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가들은 이 탈구조화 혹은 주체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예술의 이러한 차연(différance)은 예술의 정의를 한없이 지연시키며, 예술이란 정적인 규범이 아니라 끝없이 유동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행위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예술도 훗날엔 누군가에겐 질려버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 될 것이며, 오늘날의 익숙하고, 진부한 무언가는 그 미래에는 예술이 될지도 모른다. 이 차연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으며, 그 수레바퀴가 멈추는 그 순간 예술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


주인장 신작,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작가의 이전글 인문학적 과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