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tological dilemma
실존에 대한 논의는 닫힌 결말로 끝날 수 없는 열린 서사일 것이다. 인간실존을 어떻게 바라보던 자유의지를 긍정하고, 하이데거의 피투성(Geworfenheit , thrownness , 被投性)과 기투(企投 , Entwurf , Projection)를 알고 이해한다면 더더욱 이에 대한 반발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인간 실존이란 정해져 있지 않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며, 동시에 저주받은 공포의 대상일 수 있다.
우리는 라면을 끓일 때조차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물이 끓으면 면을 먼저 넣어야 할지 혹은 수프를 먼저 넣어야 하는지 혹은 라면 말고 다른 것을 먹을지 아니면 굶을지. 선택을 하지 않는 것조차도 선택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이라는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단 하나만이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선험적이다. 그것은 현존재의 "피투성"이다. 피투성(내던져져 있음)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세계 속으로 우리가 이미 던져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 중에 아무도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우리는 태어나짐을 당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존재의 탄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와 실존은 피투에서 시작된다. 유신론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무신론자들 중에서는 인간이 던져진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이라는 절대자를 배제하고서 우리의 탄생과 기원을 우연이 아닌 필연에 기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자체도 두 가지로 나뉜다.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의 사상과 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 그리고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와 같은 사람들로 대표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전자는 사조의 이름처럼 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후자는 부정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 쪽에 더 가깝다.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견해로 인해서 후자를 지지하는 면도 있지만, 하이데거, 니체, 사르트르의 철학이 유신론자들의 사상보다 더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피투성을 부정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피투성이 인간에게만 한정되는 것일까? 글쎄, 난 아닌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쓰는 현재 내 앞의 노트북과 커피는 자진해서 나에게 봉사하는 것 같지 않다. 노트북은 수많은 선택을 당하고, 조립됨으로써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고, 이 커피는 바리스타가 원두를 갈아서 만든 것이기에 능동적으로 그 존재를 이룬 것 같지 않다. 수많은 예시를 들 수 있겠지만 이 두 가지만으로도 피투성이 인간이라는 한 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그렇다면 피투는 인간만의 고유한 존재개념이 아닐 것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우선 두 영역으로 구분한다. ‘사물’과 ‘인간’의 영역이 그것이다. 이 구분은 ‘의식’의 출현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물은 의식을 갖지 못한 존재인 반면,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다. 다음으로 사르트르는 인간을 다시 ‘나’와 ‘타자’로 구분한다. 이렇게 구분된 ‘사물’ ‘나’ ‘타자’, 이것이 바로 『존재와 무』에서 논의되고 있는 “존재의 세 영역”이다. 사르트르는 이 세 영역에 각각 즉자존재, 대자존재, 대타존재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사르트르의 존재론에서 각각의 존재는 ‘필연성’과는 무관한 존재, 그러니까 존재이유와 존재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한 존재로 여겨진다.(변광배, 118-9)”
여기서 대타존재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선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만을 다룰 것이다. 사르트르는 즉자존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즉자존재는 자기 충족적이다. — 존재 내부에 추호의 빈틈도 없다. 둘째, 즉자존재는 다른 존재와 결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즉자존재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와는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는 존재, 따라서 ‘운동’ ‘결여’ ‘미래’ ‘가능성’ 등과는 거리가 먼 그런 존재이다(변광배, 120).” 그에 따르면 즉자존재란 사물과 같은 실존을 말하는 것 같다. 그 자체로 충족된 존재이자,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존재이자 그 자체로 그대로인 존재. 앞에서 예시로 든 커피와 노트북은 전형적인 즉자존재이다. 컴퓨터는 그 자체로 운동을 하지 않으며, 미래와 가능성은 그 스스로 불가능하다. 이 존재를 이용하는 '나'라는 현존재가 있음으로써 그 가능성, 운동, 변화는 가능해진다. 따라서 즉자존재란 간략하게 말해서 능동적 사유와 변화가 불가능한 사물과도 같은 실존을 영위하는 존재를 일컫는다. 사과는 스스로 주스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컴퓨터는 아침 7시에 자발적으로 켜져서 바이러스를 검사하며 나에게 날씨와 뉴스를 브리핑해주지 않는다. 사과는 사람의 선택에 의해서 사과 주스가 되며, 컴퓨터는 이용자의 프로그래밍과 명령에 의해서 그러한 작업들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즉자존재에게 변화와 가능성이란 혼자서 불가능하다. 그 존재에게 세계란 마치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듯이 멈춰있는 것이며, 변화란 일어나지 않는다. 그에게 세계란 그냥 있는 것이며, 없는 것은 앞으로도 없으며, 영원히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대자존재는 의식의 주체인 인간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자기’를 ‘향하여’ 있는 존재를 일컫는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대자존재는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를 토대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를 그 자신의 의식의 지향성의 한 항목으로 출두시킴으로써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자존재인 인간의 위대함, 곧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지위가 확보된다(변광배, 121)." 두 번째로 사르트르는 대자존재의 ‘결여’를 말하는데, 그에 의하면 대자존재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결코 그럴 수 없다. 마지막으로 대자존재에게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 “‘기투’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앞으로 내던지는 것이다. 곧 미래를 향해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122).”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먼저 '실존'하고 그런 다음 '본질'을 갖는다.
대자존재에 대한 정의는 인간실존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이며, 그것은 인간 고유의 존재방식이다. 내던져진 인간의 존재는 자기 자신을 향하며, 그 불완전성이 그 지향성을 촉발시킨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 염려는 이러한 대자존재의 상태이며, 고유한 성질이다. 우리는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자기를 계발하며 발전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 계발을 온전히 자의로 행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타의보단 자의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을 행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토익 900점을 못 넘으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하지 않으며, 운전면허증이 없다고 세상은 우리를 굶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기 존재를 향해서 기투하며, 그 존재의 불완성을 메우려고 할까? 그건 현존재의 염려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와 불완전한 실존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우리를 스스로 단련시키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불안을 떨치기 위해서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다.
현존재에게 혹은 대자존재에게 자유와 가능성은 저주이자 그 존재의 축복이다. 열려있는 미래와 그의 정해져 있지 않은 본질로 인해서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붓을 들면 화가가 될 수도 있고, 대리석 앞에서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조각가가 될 수 있으며, 일렉기타를 손에 쥔다면 마이클 랜도우와 같은 연주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존재의 열려있는 가능성과 미래로 인해서 그는 그 그림을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고, 대리석을 조각하다 의도와 다른 곳을 깎을 수도 있고, 기타를 연주하다가 다른 현을 연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존재는 그러한 실수와 실패로 불안과 염려에 잠식되지 않는다. 실패는 그를 더욱 연습하게 만들고, 염려는 그의 창작과 실존에 촉매가 된다.
사유할 수 있는 존재이며,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고유한 존재양태가 대자존재임에는 확실하지만 모든 인간이 대자존재인 것 같지는 않다.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나 미성숙으로 인하여 온전한 대자존재가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도 인간이라는 존재임에도 즉자존재인 현존재는 많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는데, 거시적으로 본다면 생물 종 중에서 인간만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오경수, 192).) 사유능력과 잠재력 그리고 능동적인 운동가능성과 미래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존재 자체로 온전하다는 착각 속에 빠져사는 즉자적인 현존재는 나이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어디에든 있다. 자신의 미래를 기획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 본인 실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알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갈구하지 않고 쾌락에 빠진 존재. 기계같이 틀에 박힌 삶을 살면서 남들이 하는 대로만 흘러가는 존재,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 등 세상에는 수많은 현존재들이 염려를 피하거나 인지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한 존재가 모두 즉자적 현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회피 또한 현존재의 고유한 특성이며, 실존의 기로에 놓인 대자존재가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인간임에도 사유와 결정을 포기한 채 즉자적인 현존재임을 스스로 자처하는 존재는 많다. 인간임에도 왜 본인의 본유관념과 같은 실존을 왜 포기했냐고 묻고 싶지는 않다. 그것마저 그의 선택이니까. 호기롭게 실존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 쓴 이 글을 나는 어떻게 마쳐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이 글을 마친다.
변광배, 「장뽈 사르트르 : 인간 존재 이해를 위한 대장정」, 『현대프랑스철학사』, 창비, 2015.
오경수, 「현존재와 그의 염려 - Dasein und seine Sorge」,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퍼플,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