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 of super ego
프로이트의 영향력은 가히 막강하다. 철학, 심리학 그리고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 그의 영향은 지대하다. 그의 이론의 등장 이래로 온전하게 '하나'라 여겨지고, 자명해서 더 이상 분리불가능한 주체라는 현존재의 본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Cogito ergo sum이라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는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의 시발점으로서 인간을 대우한다. 생각하는 '나(soi)'라는 존재가 없으면 생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무도 감히 의심하지 않았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가 가져온 결과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나라는 주체는 온전한 것이며,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신이라는 일자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출발점이 생각할 수 있는 자기(혹은 주체)로 설정해 놓고, 신의 존재와 진리에 도달하려 했다. 두 번째,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광인으로 취급되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는 인간의 이성을 증명했다는 관점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플라톤 이래로 이항대립의 역사이던 서양철학사에서 데카트르 이래로 이성이라는 합리성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 ―광기 혹은 비이성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 반대의 사람들보다 열등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등장으로 이러한 주체의 자명성과 이성의 합리성에 균열이 생겼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의식하는 부분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의식을 그냥 의식이라고 표현한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심연의 의식을 무의식(Unconsciousness)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주체란 진리를 탐구하기에 자명한 출발점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의식보다 무의식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 행위 또한 내 의식에 의해 발현된 동작이지만, 어쩌면 내 심연 속의 어떤 무의식에 의해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서두가 길었는데,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초자아의 기원을 논해보려 한다. 흔히들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로 들뢰즈, 데리다, 푸코를 꼽는데, 이들의 사유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하다 보면 또다시 세 명의 독일철학자가 나온다. 니체, 프로이트, 맑스. 나는 이 글에서 푸코를 대표로 한 후기 구조주의 사유를 통해서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창한 개념인 초자아에 대해서 다뤄보려 한다. 아마 결론은 간단할 것이다. 내가 속한 구조가 내 초자아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마 이 글의 결론이 될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서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이 어떻게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 학문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스스로를 얼마나 아는가? 백분율로 환원했을 때, 우리는 과연 스스로를 얼마나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어느 숫자가 용인할 수 있는 수치일까? 일단 100%라고 말하는 사람의 대답은 의심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무의식까지 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100이라는 숫자를 외쳤을 테니 말이다. 자신의 무의식까지 전부 인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현자를 넘어서 전지전능한 신일 것이다. 그런데 신이 있는가. 니체라는 철학적 메시아의 등장으로 그는 죽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가.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발견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인지하는 스스로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빙산의 일각과 같이 드러나는 우리의 의식은 아주 일부이며, 드러내지 않은 부분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드러나는 부분 즉, 우리가 아는 부분은 극히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부분은 무엇이며, 모르는 부분은 무엇인가? 일단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부분 즉, 해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은 평소 우리가 의식하는 '나'다. 나를 의식한다는 것은 나를 의식의 지향점 앞에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나를 뜻한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생각들, 스스로 돌아보는 표면적 자신이 바로 우리가 아는 부분이며, 이때 이 심리를 자아(Ego/Ich)라고 한다. 나머지 두 개의 심리는 각각 초자아(Superego / Über-Ich)와 원자아 혹은 원초아(Id / Es)라고 한다. 초자아와 원자아는 서로 반대의 성격을 지닌다. 우선 초자아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심리다. 도덕적인 행위, 양심, 죄책감 등의 기원이 이것이다. 초자아는 자신을 발달시키고, 사회적으로 적응시키려 하는 경향을 띤다. 전반적으로 초자아는 선(善)을 추구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착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반면에 원자아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본능적인 것을 추구한다. 초자아가 길거리에 넘어진 여성을 구해주는 젠틀남이면, 원자아는 그 여성을 어떻게 해보려 하는 치한일 것이다. 초자아는 자신의 밖에서 형성되는 초자아와 달리 우리의 깊은 심연 속에서 형성된 심리이다. 프로이트는 원초아에 대해 “접근할 수 없는 우리 성격의 어두운 부분이다. 우리는 단지 원초아에 대해 유추할 수 있을 뿐 달리 접근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마치 펄펄 끓는 흥분의 가마솥과도 같으며, 끓어오르는 자극과 흥분으로 가득 찬 혼돈 상태라고 할 수 있다.”라고 표현하였다(상담학 사전).
세 명의 나는 ego, id, super-ego다. 앞에서 초자아가 선(善)을 추구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반대편의 원초아는 악(惡) 한 것일 거다. 그렇다면 자아(ego)는 과연 선과 악 중에 어떤 상태일까? 자아는 이 둘의 사이에 끼어있는 심리이며,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자아라 함은 원초아와 초자아의 대립과 경쟁을 보여주는 parameter일지도 모른다. 원자아는 자아에게 본능을 추구하고, 쾌락을 취할 것을 권하지만, 초자아는 자신의 이익보다 도덕적인 행위를 권한다. 이 둘은 마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과 같다. 이 둘의 이항대립은 붕괴시킬 수 없으며, 양립해야만 서로 각자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때 원자아로 대표되는 “무의식이란 고거의 여러 사건이 우연적으로 어떤 구조를 형성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의 알 수 없음은 과거의 여러 연결의 우연성 때문”이다(지바 마사야, 125). 우리가 무의식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듯이, 그 무의식이란 우리가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초자아는 철저히 구조적으로 형성된 결과물이다. 도덕이라 함은 내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샘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우리에게 바라는 바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철저히 외재적인 요소다.
앞에서 서양철학사를 이항대립구조의 역사라고 표현한 바 있다. 헤겔적 사고일 수 있는데, 한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나 보다. 만물은 움직인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와 만물은 정지해 있다고 말한 파르메니데스를 시발점으로, 서양철학은 서로 다른 담론들의 대립의 연속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그러한 대립은 여전했는데, 20세기에 프랑스에서는 주체의 형성에 대한 문제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로 나뉘었었다. 각각의 테제와 안티테제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진테제를 이루지 못했다. 그만큼 인간실존에 대한 문제는 심오하며,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나 보다. 그래도 하나의 관점을 가질 수는 있지 않겠는가? 나는 주체를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개인(혹은 주체)의 특성은 그가 갖는 본질이 아니라 ‘구조 전체 배열이 만들어 내는’ 하나의 효과, 결과이다. 다른 구조, 다른 체계, 다른 배열은 다른 의미, 다른 특성, 다른 개체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각 개인, 곧 주체는 그가 속하고 있으며 그를 만들어 낸 구조가 발생시킨 효과이자 결과이다. 한마디로 주체는 구조의 효과이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차이들의 체계 혹은 구조가 개별자의 특성을 발생시킨다(허경, 19-20).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비시간적 본질을 갖는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실체가 아닌 특정 시공간 내에서 구성된 사회적, 문화적 구성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당신의 역사, 당신의 경제, 당신의 사회적 실천, 당신이 말하는 랑그, 당신 선조들의 신화, 심지어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해 준 어릴 적 우화까지, 이 모든 것이 실은 당신 자신도 명확히 의식하지 못하는 일련의 규칙들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허경, 224).
우리는 과연 진정 스스로 형성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린 도덕이 있기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규율로 인하여 집단의 효율을 증대시킨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우린 수동적으로 형성될 필요성도 다분하게 가진다. 이런 면에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말하는 형성된 주체는 프로이트의 초자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과 세 개의 자아에 대해서 논하고, 그 후에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아보았다. 후기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대표로 불리는 3인방이 있다. 셋 다 프랑스 철학자인데,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다. 이들과 반대되는 사조인 실존주의는 흔히들 3H―Hegel, Husserl, Heidegger―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그 사조에 해당하는 학자로는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시몬 드 보부아르를 예로 든다. 그들처럼 구조주의 3인방에게도 철학적 원류가 세명 있다. 푸코의 논문 제목으로도 유명한데, 그들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리드리히 니체, 칼 맑스다. 이 세명의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니체의 향기를 느끼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굳이『도덕의 계보학』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 해체적인 사유는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에 대해선 그들의 사유에서 느낄 수가 없었다. 물론 내 배움이 짧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나, 나는 그들에게서 무의식이라는 단어와 정신분석학적인 학술내용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푸코, 데리다, 들뢰즈에게서 프로이트의 단서를 찾은 것 같다. 그들은 정신분석학자도 아니며, 의사는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언가를 배격하려 했으니, 그것은 주체의 이데아 혹은 실존의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였다. 그것은 프로이트 이론의 초자아와 같은 것이었다. 구조가 바라는 나, 유용한 인구로써의 삶, 그저 노동기계로써 최대효율을 뽑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환경 등.
그렇다고 내가 초자아 자체를 부정하고, 배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초자아란 필연적인 심리다.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온전하고, 지금처럼 계속 영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기(moi)에 비해서 너무나도 비대해진 초자아가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우린 벗을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초자아가 아무리 선(善)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적당해야 한다. 흔히들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신에게 필요하고, 간절한 것이라도 남이 필요하다면 그냥 다 내주는 그런 상태. 어쩌면 이러한 신경증적 증세는 너무나도 비대해진 초자아가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은 그 형틀에서 벗어나 주체(sujet)가 아닌 자기(moi)를 추구함으로써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조화를 말한 니체처럼 그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것은 아닐까?
결론적으로,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맞다. 도덕이라 불리는 초자아는 사회라는 구조, 지위라는 위치에 의해 부여된 변수(Variable)이다. 니체적 방법론으로 원자아에 대해 의심을 품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라는 상수(Constant)를 찾고자 했으며, 그 원인은 eudaimonia였을 것이다.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입문』, 김상운 역, 아르테, 2022.
허경,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읽기』, 세창미디어, 2021.
[네이버 지식백과] 원초아 [id, 原初我] (상담학 사전, 2016. 01. 15.,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