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lectic rejection of blind Mythos
위의 회화를 보면 제목처럼 갈색 망토를 두른 남성은 성모 마리아로 보이는 여성에게 뭔가를 간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심해 보이는 여성의 표정과 두 손을 싹싹 비는 남성의 특징뿐만 아니라 시선의 구도에서도 우린 이들 사이의 관력관계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 외에도 눈에 띄는 인물이 하나 있다. 머리에 하얀 두건을 한 남성이 반쯤 누워있다. 망토를 두른 남성이 성모자로 추측되는 대상에게 간청하는 모습과 달리 그의 자세는 경건하지 못해 보인다. 제대로 차려입지 않은 옷차림, 반쯤 누워있는 포즈, 시니컬한 표정을 두건을 한 남성은 망토를 두른 남성과는 사뭇 다른 태도로 이 회화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두건을 한 남성 뒤에는 고개를 쳐들고 기도하는 또 다른 인물도 보이고, 그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도망가려 하는 다른 인물도 보인다. 어쩌면 저 회화는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심판의 날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심판의 날에 머리를 괴고 있는 저 남성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방관하는 제3자에 불과한 회화의 외부인인가? 어쩌면 두건을 두른 남성은 저 그림 속에서 유일하게 신을 믿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
오늘 다루려는 주제는 바로 믿음 혹은 신념이다. 신을 믿는 종교적인 믿음만이 믿음이 아니다. 우리가 지식이라 일컫는 것들도 일종의 믿음이다. 지식의 인식론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정당화된 참된 믿음. 여기서 정당화되었다는 것은 그 믿음의 토대가 있으며, 그것이 인과관계로서 인정되었음을 말한다.
그런데 종교적인 믿음 또한 구체적 근거를 토대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인식될 수 없는 존재인데?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믿음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 증명이 가능한가? 이 질문은 여기서 다루기에 너무 고차원적인 질문이라서 오늘은 신학적 믿음이라는 구체적인 범주 말고, 믿음이라는 거시적 범주에서 논하고자 한다. 이론적 배경으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헤겔의 변증법을 이용해보려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을 한『자유론』 단어로 요약하자면 나는 "두 가지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두 가지 자유란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유 그리고 사유를 발화하는 개인으로써의 자유를 말한다(오경수, 204).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유. 우리의 자유는 주로 윤리적 측면에서 제한된다.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등 주로 타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우리의 자유는 허락된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유재산에 대한 인정은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기본권인 것이다. 내가 존 스튜어트 밀의 책을 고른 이유는 그저 자유에 대한 부분 때문은 아니다.
『자유론』의 제2장의 제목은 "사상과 토론의 자유"이다. 여기서 밀은 의견과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인류의 기본적인 정신적 복지에 필수적이라는 사실 근거를 다음과 같이 든다. 첫째, 침묵을 강요받는 어떤 의견이 참일지도 모르며,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결코 오류가 없다고 근거 없이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견이 반드시 전체적 진리가 아니므로, 진리의 나머지는 오직 반대 의견들과의 충돌에 의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의견이 참이며 전체적 진리라도 활발하게 논쟁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합리적 근거를 파악하지 못한 채 어떤 편견의 형태로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로운 토론이 없다면, 교리 자체의 생생한 의미는 상실되거나 약화되어 단순한 형식적 선언에 그치고 실질적이고 감동적인 확신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존 스튜어트 밀, 14-5).
자유론 2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어쩌면 당연한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구조주의적 사유와 결이 비슷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자명한 것, 자연스러운 것,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을 사회적 구성물들로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사회적 구성물들을 자연적인 것 혹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기존의 습관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사실 우리가 인식하고 장악해야만 할 특정 규칙 및 정당화가 빚어낸 특정 구성 작용의 효과임을 인식해야 화고, 이런 것들이 어떤 조건과 어떤 분석의 관점에 의해 정당화가 가능했는가를 규명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결국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특정한 이론을 요청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가능케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담론적 사실의 장’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허경, 81-2).
의심과 토론이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다소 부정적이다. 의심이라는 것은 신뢰를 깨는 이미지를 주며, 토론이라 함은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입담과 논리로 상대의 주장을 부수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토론과 의심은 건전한 필요악이다. 아무리 쓸데없어 보이고, 공상적인 헛소리라도 그 짧은 문장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으며, 그것이 기존의 관습보다 나은 대안일 수 있다. 따라서 밀은 자유롭게 토론과 의심을 하도록 권유한다. 절대적인 것 같이 허물 수 없는 진리와도 같은 명제일지라도, 결국은 더 나은 명제가 나온다면 그 왕좌에서 내려오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러한 면에서 그의 공리주의 철학자로서의 면모가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 나은 담론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주장이던지 내뱉을 자유. 그리고 그에 대해 토론할 자유 때문에 이 책의 이름이 자유론(On Liberty) 일지도 모른다.
헤겔의 영향력은 지금은 줄어들었지만, 독일뿐만 아니라 주로 매우 컸다. 19세기말 미국과 영국의 주요 학술철학자들은 대부분 헤겔주의자들이었다(Russell, 730). 뿐만 아니라 미셸 푸코는 헤겔 이후의 철학은 그게 비판이 되었든 동의가 되었든 간에 헤겔이 뿌려놓은 씨 위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헤겔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우리는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어떤 대단한 면모가 우릴 그의 그늘에서 못 벗어나게 하는가?
그것은 아마 그가 체계화한 변증법(dialectics)일 것이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 나타나지 않는 한, 아니 어쩌면 절대적인 것이 나타날지라도 그것 또한 변증법적 사고 안에서 놀아날 뿐일 것이다. 대체 그 변증법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럴까?
변증법을 쉽게 설명하자면, 정반합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정'은 테제(These)를, '반'은 그에 반대하는 안티테제(Antithese) 그리고 '합'은 그 둘의 대립 사이에서 태어난 더 나은 명제인 진테제(Synthese)를 일컫는다. 철학사에서 예를 들어보자.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대표되는 관념론자들의 명제를 테제로 놓으면 그들과 반대의 입장을 가지는 로크, 흄, 버클리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의 명제가 안티테제가 될 것이다. 안티테제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테제에 반(反)하는 본질을 가진다. 관념론자들은 지식의 근원이 우리의 '내부'인 이성이라 말하고, 경험주의자들은 지식의 근원이 내부가 아니라 '외부'인 경험이라고 한다. 각각의 테제는 서로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런데, 이 테제가 모두 진리일 수 없다. 만약 그 둘 다 진리라면 이 세상 자체가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 이 둘이 대결을 하게 된다. 경험주의냐 본질주의냐, 영미철학이냐 대륙철학이냐. 그러나 그 대결은 당사자들의 손에서 끝나지 않는다. 경험주의와 본질주의의 승부는 칸트에 의해 종결된다. 그래서 칸트는 누구의 편이었을까? 칸트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칸트는 그 둘을 합쳐서 자신만의 철학세계를 구축했다. 그래서 칸트를 서양철학의 저수지라고 말한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 모이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에게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칸트의 철학 또한 테제로써 안티테제를 맞이하게 된다.
헤겔에 의하면 이 변증법의 끝은 절대정신에 도달했을 때이다. 그러므로 그전에 이 변증법은 끝나지 않는다. 그 어떤 진리라도 안티테제가 있기 마련이라는 소리다. 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 혹은 아이폰이냐 갤럭시냐 등 세상 모든 것에는 그에 반(反)하는 안티테제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안티테제는 테제가 진보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촉매제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어떤 사실이 진리라고 여겨질지라도 그것에 반하는 안티테제는 생기기 마련이다. 만약 그것이 진리라면 그것의 안티테제는 테제와 맞서 싸워도 진테제가 되지 못할 것이며, 더 자명한 진리가 와도 그 테제는 자기 자체로 굳건히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테제가 안티테제에 의해서 무너지고, 새로운 진테제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변하는 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믿음에 대한 자유와 변증법. 믿음이란 소망이나 바램을 담기도 한다. 그 근거가 없어도 믿음은 믿음이다. 신이 실존한다는 믿음은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믿음이다. 내일 비가 온다는 믿음, 몇 년 뒤에 재림예수가 온다는 믿음 등 수많은 믿음들이 가능하다. 그러한 이러한 상상할 자유 또한 우린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개인적인 소망일 경우 타자나 사회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에 떠도는 사유 중에 하나일 뿐이니까. 그런데 이러한 사유를 발화하고, 남에게 강권한다? 그건 좀 문제일 것 같다. 근거도 없이 믿으라 하는 종교? 그것은 사이비와 다른 바가 없다.
근거 없는 맹목적인 믿음(mythos)은 합리적인 이성(logos) 앞에서 무너지기 마련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이 로고스로 해결되는 않는다. 과학과 철학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문제도 아직 많다. 따라서 로고스로 설명할 수 없는 미토스들도 많이 존재한다. 신의 존재? 그건 과학과 철학이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명제를 지탱해 주는 근거는 미토스 혹은 파토스(pathos) 일 수밖에 없다.
믿음이라는 이름의 테제가 있고, 그에 대한 안티테제가 있을 때, 그 안티테제의 진리값이 더 크다면 우린 그 믿음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변증법을 피하고자 한다. 그저 자신의 테제가 진테제 혹은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그냥 지키려 한다.
어느 테제가 흔들린다면 그 변증법적 대립을 피하기보단 직면하길 권한다. 그 명제가 패배할 경우 우린 더 나은 테제를 얻을 것이고, 그 명제가 승리할 경우 우리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심하라! 의심하고 믿을만하면 믿고, 배울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만 수용하라. 단점은 단점대로 인정하고, 배울 점은 배워라. 맹목적인 믿음만큼 멍청한 것은 없다. 따라서 의심해 보고 믿을만하면 믿어라. 더 많이 부딪쳐본 돌이 더 매끄럽고, 단단하다. 좋으면 추억이고, 나쁘면 경험이다.
오경수, 「두 가지 자유」,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퍼플, 2024.
Bertrand Russell, The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NewYork:Simon&schuster, 1972.
John Stuart Mill, On Liberty, Kitchener:Batoche Books, 2001.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이종훈 역, 지만지, 2008.
허경,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읽기』, 세창미디어,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