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경수 Jul 10. 2024

현존재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

『판단력 비판』의 관점으로 본 현존재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 <12송이 해바라기>(1888)

칸트 미학 

  칸트는 제3비판서인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에 대해 논한다. 칸트의 이론이 전반적으로 서양철학사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후대 철학자들이 그의 그늘에 벗어나 철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우린 미학을 논할 때 마저 칸트에게 빚을 지고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 칸트 미학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미학론의 극히 일부만 나의 목적을 위해서 다룰 것이다. 인간―혹은 현존재―의 실존을 다루려는 이 글이 칸트의 예술론으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결론짓고자 하는 것을 논하기 위해서 칸트의 미학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 완벽하거나 유용하거나 좋다고 판단할 때, 이것은 언제나 이 사물이 완벽하거나 유용하거나 좋기 위해 어떠해야 한다는 개념과 관계가 있다. 반대로 미적 판단은 절대 이런 개념을 연루시키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은 어떤 개념의 매개 없이 단지 쾌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AP, 137). 지우개는 잘 지워져야 완벽하거나 유용하거나 좋다고 판단되고, 보온병은 내용물의 온기를 잘 보존해야 그렇게 판단될 것이다. 즉, 사물의 탄생 원인―혹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사물들은 어느 특정 본질이나 기능을 위해 생겨난 것이다. 나무막대기 중심에 기다란 흑연을 넣었더니 연필이 된 것이 아니라, 연필이라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 나무막대기 중심에 흑연을 박은 것이다. 도구의 충성도는 그 본질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정해져 있다. 도구라는 것은 어떤 행위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인 동시에, 부수적인 과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술작품과 미(美)는 도구가 도구로서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눈앞에 목적으로 나타날 때 아름답게 보인다. 다른 말로, 아름다움이란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서 시작된다고 칸트는 말한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 그것은 꽃의 본질과 무관한 것에서 출발한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식물의 생식기관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관조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칸트는 합목적성에 대해서 말하는데, 세상 모든 것에는 그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의견이다. 신의 존재를 요청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었을까? 세상 모든 것에 존재의 이유가 있다니. 과연 칸트다운 사유다. 여하튼 모든 사물은 그 존재 이유 혹은 목적이 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며, 도끼는 나무를 찍기 위한 도구이며, 식칼은 음식을 썰때 쓰는 도구이다. 이때 이 존재들은 수단이자 도구이다. 이 순간 우리는 이 사물을 인식하지 않고, 마치 투명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경우 우린 그것을 도구나 수단이 아닌 목적이자 사물로 여긴다. 그 예술작품은 합목적성에서 벗어난 존재를 말한다. 그것은 투명하지 않고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이며, 나의 시선은 그 사물을 꿰뚫지 못하고, 그 작품에 가로막힌다. 이때 관조가 시작된다. 사물이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린 그것을 작품으로 여기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결국 미의 기원은 ‘목적 없음’이다. 이것이 칸트가 미를 정의한 그 유명한 문구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다. 미는 목적 없음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칸트 미학의 핵심이다(SA, 96). 실용적 목적으로부터 순수하게 단절되었을 때 하나의 대상은 완벽하게 아름답다(94). 


현존재의 피투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키워드를 고르자면 아마 존재(Sein)와 피투(Geworfenheit)가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서양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말한 이 학자가 "존재"라는 개념은 정의될 수 없다고 했을지라도 말이다(SZ, 17). 하이데거는 지난 몇천 년간의 철학은 존재에 대한 사유가 아닌 존재자에 대한 사유였다고 비판한다. 존재에 대한 물음에는 대답만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 물음 자체가 어둡고 갈피를 못 찾고 있었고, 따라서 존재물음을 다시 제기한다고 함은 우선 일단 물음제기를 충분하게 정리작업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8).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의 기원에 대해선 '피투'라는 용어를 내세우며 정의했다. 영어로는 Thrownness. 단어 그대로 던져짐을 암시한다. 사물과 도구는 현존재의 필요에 의해서 발명되고, 생산된다. 본질이 정해지고, 그다음에 그 존재가 주어진다. 하지만 현존재라 불리는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고유한 목적성을 선행하고 나서 탄생하지 않는다. 그냥 태어나짐을 당한 것이며, 그에게 필연적 본질이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불안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누구와 함께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보장된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정해진 본질과 목적이 없는 인간 존재. 동시에 세상에 던져짐을 당한 존재가 바로 거기에 있는 존재인 현존재이다. 본질이 정해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존재방식이 현존재의 고유성일 것이다(RD, 192)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후대 프랑스철학자들에 의해서 심화된다.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 사르트르 사유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 문장보다 더 적합한 문장이 있을까 싶다.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EH, 33).

  결국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정립하고자 하는 이론은 인간의 필연성에 대한 부정이다.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며, 그 목적은 자신의 선택의 영역에 해당된다. 그의 실존의 탄생은 본질을 앞서고, 그의 삶의 목적은 필연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 부분에서 현존재의 실존 또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띈다고 볼 수 있다.


현존재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

  현존재는 투명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대자존재이며, 목적이며, 존중해야 할 대상이다. 동시에 그를 응시하는 내 시선은 그를 꿰뚫지 못하고, 그에게 머문다. 현존재의 불투명성, 비도구성은 어쩌면 그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것 같다. 하긴, 상어의 사체도, 예술가의 인변도, 덕트 테이프를 붙인 바나나도 예술이고, 행위 예술도 예술로 인정받는데, 인간 실존이라고 예술로 인정받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예술 혹은 작품은 기존의 의미와 다를 것이다. 관람자의 참여와 작품 자체의 기투가 예술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 혹은 현존재의 실존은 목적 없이 달려가고 있다. 어디론가 벡터를 가지지만, 그 종점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그 종점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것이다. 그것이 수동적인지 능동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현존재의 결말은 죽음이라는 허무함일 것이다. 이 목적 없이 달려가는 반직선과 같은 인생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띤다. 현존재는 그로 인해 불안을 느끼기도 하며, 선택의 기로에서 행복을 누리기도 한다. 닫혀있는 결말과 그를 향해 달려가는 열려있음. 이것이 인간 실존의 핵심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닫힌 엔딩과 그를 향해 어떻게 전개해 나갈지에 대한 열린 자유. 그렇다고 인간의 합목적성이 죽음이라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죽기 위해서 인간이 탄생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인간 실존의 목적이라면 사티로스의 말처럼 태어나지 않거나 일찍 죽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일 테니까.

  우린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띄는 실존을 작품과도 같다 볼 수 있다. 합목적성 없이 달려가는 어느 순간이던 우린 실존이라는 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론 자신의 작품인 자기를 만들기도 하며, 때론 타자의 작품인 타자를 관조하며 영감을 얻기도 한다. 그렇다면 미(美)인 삶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 


Reference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 1998. (SZ)

박정자, 『숭고 미학』, 기파랑, 2023. (SA)

시릴 모라나 · 에릭 우댕, 『예술철학』, 한의정 역, 미술문화, 2019. (AP)

오경수,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퍼플, 2024. (RD)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박정태 역, 이학사, 2022. (EH)


네이버 블로그


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작가의 이전글 사물이 작품이 되는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