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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01. 2024

사물이 작품이 되는 순간

예술이 나타나는 순간

리처드 세라(Richard Sera, 1938~2024) - <To Lift>(1967)

서론

  미학적 관심이 있다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평범한 소변기, 덕트 테이프를 붙인 바나나, 인분, 상어의 사체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를 응시하거나 지상파 방송에서 버거를 먹는 행위도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경계 허물기의 시작점은 뒤샹일 것이다. 변기에 R.Mutt라는 서명만 했을 뿐인데, 그것은 <샘>이라는 작품이 되었고,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샘>을 빼놓고 현대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존재를 논하지 않는 하이데거와도 같은 상황일 것이다. 왜 카텔란이 평범한 바나나를 덕트 테이프를 통해서 벽에 붙이면 억대의 고가의 예술품이 되며, 만초니가 자신의 인분을 담은 깡통은 쓰레기가 아니라 예술작품이며, 아브라모비치가 하는 행위들은 예술로 규정되는 것일까? 

  예술가들이 예술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들이 예술가를 만드는 해석학적 순환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술에 대한 권력적인 원인이다. 이 경우 작품에 대한 담론과 예술가의 권력에 의한 것이므로, 예술이라는 본질을 작품 내에서 찾을 수 없다. 과연 예술이라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에게서 부여되는 성질인가? 

  예술작품이 작품으로 인정되는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고전주의시대의 예술과 현대의 예술이 그 두 가지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은 예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 작품을 혐오하더라도 예술작품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인정이 본인의 자의적 인식이 아니라 사회적 담론 때문이든 간에 그 시대의 작품들은 예술작품으로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은 다르다. 누군가는 예술이라고 믿고, 누군가는 사기라고 여긴다. 그 이유는 미(美)와 숭고(Sublime)의 대립 그리고 의미정보와 미적정보의 대립의 결과에서 유발된 것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는 미 vs 숭고 그리고 의미정보 vs 미적정보라는 두 개의 대립관계가 공존하는 것이다. 어쩌면 숭고와 미의 대립은 미적정보 속의 또 다른 액자식 구성의 대립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두 대립을 각개의 것으로 보겠다. (미와 숭고의 대립은 박정자 선생님의 이론이며, 미적정보와 의미정보에 대한 이론은 진중권 선생님의 이론이기에 다른 시각에서 형성된 담론이다.) 

  나는 이 글에서 작품이 작품이 되는 이유를 사회적 담론과 권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선대 어느 철학자들에 의하면 작품에 대한 무관심성, 목적 없는 합목적성 그리고 본질을 다하지 못하는 불투명함은 사물을 예술로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여기서 목적 없는 합목성, 무관심성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나는 칸트 미학에 대해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그 이론에 해박하지 않다.


투명한 것과 불투명한 것

  당연하게 작동하는 도구가 주변에 많다. 전구는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빛을 내며, 누가 나에게 전화를 걸면 나는 스마트폰의 정상 작동여부나 고장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전화를 받거나 거부한다. 텔레비전을 시청할 경우에도 우린 프레임 속 방송 프로그램이나 영상을 보는 것이지 기기 자체에 대한 인식은 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 기술에 대한 믿음에 의한 제조사와 공산품에 대신 신뢰 때문일까? 확실한 것은 그 사물(혹은 도구)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사물은 사용자에게 투명한 물건이다. 이질적이지 않고 당연한 것이기에 우린 그 도구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사용한다. 이때 도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나의 행위에 일조하는 나의 연장이다.

  그러나 도구는 언제든 고장 날 수 있다. 방 안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전구도 수명이 다해 자신의 본질을 다하지 못할 수 있고, 스마트폰의 경우도 액정이 고장 나면 기존의 도구 역할을 다 하지 못한다. 이때 도구는 나의 기존의 투명한 베일을 벗는다. 그것은 당연하게 작동하는 도구아 아니라 낯선 사물이 된다. 도구의 고장, 파손 등으로 이용이 불가능할 경우 이 도구적 존재는 사물적 존재가 되는데, 이때 이 사물의 존재는 새삼 눈에 띄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고장이라는 사건의 발생으로 투명하던 도구적 존재는 사물적 존재가 되며, 동시에 수단이었던 그 본질이 목적으로 변한다. 그것은 나에게 수리의 대상이며, 문제를 해결할 대상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눈에 띔’, ‘강제성’, ‘저항성’이라 명명했다.


  사르트르는 산문과 시에서 언어의 투명성을 논한다.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서 산문과 시의 이분법을 제시한다. 산문은 단어들을 ‘이용’하면서 명확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고, 시는 언어의 바깥에 위치하면서, 그 언어 속에서 자신의 재료를 찾아내는 것이다. 산문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태도이고, 시는 언어를 사물처럼 간주하는 태도이다(강미라, 191). 즉, 산문은 기호로서의 언어를 이용하고, 시는 이미지로서 언어를 추구한다. 

  산문에서 단어들은 투명하다. 산문 안에서 단어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으며 수단으로써 존재한다. 그 단어들은 상점의 직원들과 같다. 우리는 상점의 직원이 지인이지 않으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때 직원은 스쳐가는 현존재에 불과하다. 우린 직원을 만나러 가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때 그 직원도 투명한 사람일 수 있다. 그는 내가 물건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고, 계산해서 물건을 내 것으로 만들어주는 조력자이다. 즉, 나는 이 순간에 직원을 나의 구매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구매 조력자인 그 직원의 외모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다. 그의 외모는 나의 구매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원을 보기 위해 상점에 가는 경우는 다르다. 그 직원이 내 지인이건 혹은 내가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서 가게를 방문한다면 구매가 오히려 수단이 된다. 이때 그 직원은 나의 관심의 대상이며, 목적이다. 나는 직원의 외모에 자연스레 눈이 갈 것이며, 그는 나에게 잠깐의 조력자가 아닌 동반자일 것이다. 그의 외모는 나에게 신경 쓰일 것이다. 평소보다 피부가 푸석거린다던가 헤어스타일 혹은 메이크업의 변화가 내 의식의 지향점이 될 것이다.

  여하튼 우린 세상의 사물 혹은 사람을 목적이냐 수단이냐로 인식한다. 목적으로 대할 때 그것은 사물이자 불투명한 것이며, 수단으로 대할 때 그것은 도구이자 투명한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 <샘>(1917)

  <샘>이 다른 변기들과 달리 예술 작품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예술계가 <샘>에만 특별히 예술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실 세상에 있는 어떤 물건도 예술계가 거기에 자격을 부여하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예술계가 자격을 부여하자 변기까지도 예술이 되었다(진중권, 194). 하지만 그 자격 부여만이 그것이 작품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저 소변기가 작품인 이유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관람자 앞에 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소변기가 만약 화장실에 설치된 원래의 본질에 충실한 도구였다면 우리에게 저것은 투명한 사물일 것이다. 하지만 저 소변기는 화장실이라는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 화장실이라는 지평에서 벗어남으로써 저 변기는 자신의 본질을 충실히 하지 못하며, 도구아 아닌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때 화장실이 아닌 미술관에서 본 소변기는 우리에게 더 이상 투명한 사물 즉,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소변을 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관조를 하기 위한 목적인 작품이다. 사물의 본질 즉, 도구성에서 탈피한 사물은 더 이상 수단이라는 지위가 아닌 목적이라는 지위를 취하게 되며, 동시에 비도구성을 가짐으로써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다.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

  작품은 사물이며, 목적으로 존재한다. 동시에 관조의 대상이다. 그 사물성은 도구성을 탈피함으로써 드러난다. 그 탈피는 전시, 도구성의 상실, 거래, 비평 등을 통해 발현된다. 뒤샹의 변기가 작품인 이유는 뒤샹이라는 사람이 고른 것에도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원래의 본질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도구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구이자 수단이 아닌 사물이자 관조의 대상이다. 만약 뒤샹이 남자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남성에게 그 소변기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작품이 아닐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것은 그저 소변을 보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뒤샹은 그저 취객과 같은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다. 하지만 미술관에서의 상황은 다르다. 소변기는 <샘>이라는 작품명을 부여받고 관람객들에게 전시된다. 사람들은 소변을 볼 때처럼 그것을 투명한 도구로 여기지 않고 불투명한 사물로 여기며, 관조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나는 이 글에서 예술 작품의 본질은 그 사물성과 불투명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사물성과 불투명성을 가진 것이 모두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 시작점이자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바나나를 먹는 행위는 바나나라는 식용 수단(도구)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이라기보다 일상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으로 존재하는 카텔란의 <코미디언>을 먹는다면 그건 일상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때 바나나를 먹는 행위는 예술 작품을 먹는 행위이다. 바나나를 먹는 투명한 순간이 아닌 예술작품을 먹는 불투명한 순간인 것이다. 모두가 그를 응시할 것이며, 언론은 그 행위를 기사화할 것이다. 

  결국 현대에 예술이라는 것은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을 비일상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눈을 마주 보는 행위와 바나나를 먹는 행위는 일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가끔 우리에게 비일상적인 행위가 되며, 충격을 준다. 그 충격은 예술임에도 미(美)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미'가 배제된 그 예술에는 '숭고'만 남을 것이다. 현대 예술에서 우린 '미'보다 '숭고'를 느끼기 더 쉬우며, 그것이 예술을 어렵게 만든다.

 

Reference

강미라, 『사르트르 vs 메를로퐁티』, 세창출판사, 2018.

박정자, 『숭고 미학』, 기파랑, 2023.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2』, 휴머니스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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