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던의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교
혐오와 배격은 이유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 2차 대전 당시에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학살도 불합리적이지만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다. 원인이 윤리적이던 불합리한 것과는 별개로 결과란 원인에서 독립적일 수 없다. 물론 그냥 싫을 수도 있다. "왜 걔가 싫어?" "그냥."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그냥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바는 존재의 유의식을 넘어 무의식까지 담는 굉장히 모호한 답변이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에서 그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싫어하는 것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싫어하는 이유에 그냥이라는 답변을 내놓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의식적인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현시대에 혐오받는 여러 대상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혐오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이성(raison)과 같은 다수(majority)에 반(反)하는 존재이자, 그들에 비해 약자(minority)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온전히 파악하고 그 한계점을 뚜렷이 결론지을 수 있는 존재를 자신의 아래에 두는 인간 본성 때문에 이러한 위계의 역사는 시작된 것은 아닐까?
타자에 대해 논하자면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동성애자, 무신론자, 부랑자들, 광인들 등 많은 종류의 소수자들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무신론자에 대한 담론을 펼쳐보고자 한다. 요즘에 종교적인 내용을 자주 접하기도 했고, 서구적 사고에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배제하고 사유를 펼쳐나갈 수 없기 때문에 한 번쯤은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에 대해 알아보며, 이항대립이라는 구조를 살펴보고,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이러한 사고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가볍게 알아보고자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논하면 아마 이항대립에 대한 이해가 대충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다음부터 서구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영향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성경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그리고 결론으로 서구에서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 혹은 위계의 시작이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아닐까 의심을 던져보며 글을 마치려 한다. 레비나스의 이론을 통해서 타자성에 대한 전개를 펼쳤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레비나스에 대해서 무지렁이라서 언급하지 않겠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할 때 우린 흔히 데리다, 들뢰즈, 푸코, 리오타르 등을 언급하며, 그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분류한다. 하지만 리오타르를 제외한 나머지 학자들은 자신이 포스트 모더니스트임을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자라고 분류되는 것 또한 부정한다.) 그래도 그들이 시사하는 바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로 수렴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어떤 사유이며, 어떤 이상향을 추구했을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유일한 자타공인 리오타르는 포스트 모던을 메타서사(Meta-narrative)에 대한 불신이라고 말한다.
전체주의에 반감을 품은 리오타르의 철학적 사유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 열외자 등의 권리와 인권을 되찾기 위해 모든 전체주의의 테러를 근절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의 메타 서사에 대한 사유를 알 수 있는 저작『포스트모던적 조건』은 ‘선진 사회의 지식에 관한 보고서’이며, 이 책의 주제는 모던적, 계몽적 사회에서 정립된 지식 개념이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는 어떻게 변형되어 있고, 또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탐색하는 것이다(이철우, 378).
리오타르에 의하면 세계는 언어 게임과 같은 집합 내에서 메타 서사라는 룰(rule)을 통해 운영된다. 여기서 메타 서사라는 것은 서사들의 서사이자, 서사들에 대한 담론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신이 그가 말하는 포스트 모던이다.
“‘모던’이라는 용어는 지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메타담론(métadiscours)들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면,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19세기말부터 과학, 문학 및 예술의 게임규칙에 영향을 끼친 변형들 이후의 문화상태”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는 이러한 변화들을 이야기의 위기와 관련하여 설정하는데, 모던 사회에서 이론과 실천을 정당화해 주었던 메타담론이나 거대 이야기에 대한 불신이 바로 포스트모던적 사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이철우, 379).” 스스로를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인정한 리오타르는 앞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직접 언급하면서 나름 친절하게 설명해 줬는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에 와닿지 않지 않는가? 그건 아마 담론에 대한 담론 즉,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쉽게 그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이론을 적용할 매개체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 모던을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그것은 질서를 강화하는 움직임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질서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즉'차이'에 주목한다(지바 마사야, 14). 포스트 모던은 모더니즘을 뒤집는 것이며, 모더니즘은 이항대립의 질서에 대한 강화로 볼 수 있다. 이항대립의 시작은 고대 철학의 파르메니데스 혹은 플라톤으로부터 일 것이다. 이항대립이라 함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 인식하는 것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이성과 광기,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진짜와 가짜, 남성과 여성, 목소리와 글쓰기, 신자와 불신자 등과 같다. 그런데 두 개로 양분해서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형성된다. 전자의 경우는 후자에 비해 우등한 것이며, 후자는 전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다. 플라톤은 세상을 이데아와 현실로 나누며, 전자를 진정한 것으로 두며, 후자를 그에 대한 모방으로 간주한다. 그로부터 시작된 이원론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은 두 가지의 대립으로 인식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해석되어 왔으며, 그 둘은 평등하지 않고, 위계질서에 놓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에 어느 철학자가 그 위계질서를 망치로 내려친다. 그 결과 당연하게 여겨지던 위계질서에 금이 가고, 사람들은 그 절대적 합리성에 의심을 품게 된다. 그는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도덕의 계보』(1887)로 대표되는 그의 해체주의적인 철학은 너무나도 당연시 여기던 것들에 대해 절대적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니체)와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푸코, 들뢰즈, 데리다는 니체가 사망한 후인 20세기에 이성과 주변부로 대표되는 합리성에 의심을 품고 2500년 동안 절대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이항대립구조를 해체하고자 한다.
그들은 위계보다 차이를 강조했고, 소수에 속하던 타자들은 그들의 이론에 열광했다. 그들의 철학은 소수자들에게의 목소리를 귀 기울였고,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폭로했다.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비시간적 본질을 갖는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실체가 아닌 특정 시공간 내에서 구성된 사회적, 문화적 구성물이다. 그리고 푸코로 대표되는 이들의 사조를 구조주의라고 칭한다. 이때 구조주의는 이항대립(opposition binaire)의 체계로 이해된다. 이 체계에서 가치와 의미는 개별자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는 어떤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그 차이와의 대립 작용 자체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차이에 의해서만 의미가 생겨난다. 개인의 특성은 그가 갖는 본질이 아니라 ‘구조 전체 배열이 만들어 내는’ 하나의 효과, 결과이다. 다른 구조, 다른 체계, 다른 배열은 다른 의미, 다른 특성, 다른 개체를 만들어 낸다. 각 개인, 곧 주체는 그가 속하고 있으며 그를 만들어 낸 구조가 발생시킨 효과이자 결과이다. 한마디로 주체는 구조의 효과이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차이들의 체계 혹은 구조가 개별자의 특성을 발생시킨다(허경, 18~20).
포스트 모더니스트 혹은 구조주의들은 당연시 여겨지던 절대적 불변이 철저하게 역사적이며, 시공간적 배치에 의한 결과물임을 폭로했다. 그 결과 위계에 억눌렸던 것들이 차이라는 근거를 들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구 사회를 논할 때 그리스도교를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교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예술 등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분야가 없다. 과거보다 종교의 영향력은 약해졌지만, 그것의 존재는 아직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현재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뻗쳐있다.
나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특징을 그들만의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종교와 전도의 문제에서. 타 종교와 다르게 이 종교는 유난히 전도에 진심인 것 같다. 종교라는 개인의 신념이 그들에겐 동일자의 증표이며, 그것이 없는 자는 열등한 타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타자를 자신의 동일자로 포섭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천국 혹은 하늘나라. 과연 그곳은 존재할까? 천국이라는 곳은 그저 선(善)을 많이 베푼 자가 죽음 이후에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 상징이다. 같은 이상향을 추구함으로써 그들의 경계 안에서 동일자가 되며, 같은 것을 믿고 추구함으로써 결속은 더 강화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어떤 곳일까?
천국 혹은 하늘나라는 신이 있는 곳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하나님일 것이고. 어떤 강연에서는 성경 기록의 목적 또한 천국이라더라. 이처럼 천국이란 그들의 이상향이며, 목적이며, 최고선(善)이다. 그렇다면 그곳에 어떻게 가는가? 정말로 선행을 많이 하면 죽음 이후 그곳에 도달해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
성경에 대한 해석에 따르면 천국은 비밀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것에 대해 말할 때 비유를 통해서 전달했다고 한다. 여기서 비유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비유란 흔히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사물을 예시로 드는 것을 말한다. 기차가 길다는 것을 우리는 '바나나처럼 긴 기차'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넓은 마음을 바다에 비유하여 그 추상적인 개념을 간접적으로 감각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가 제자들에게 행한 비유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비유가 아니라 의미를 감추기 위한 비유였다. 그렇다면 왜 비밀스러운 암호로 그것에 대해 말했을까? 어차피 못 알아들을 텐데 왜 말해주었을까? 천국을 감추는 도구로서 비유를 사용한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한다. 첫째로, 악한 자들에게 감추기 위함이고, 두 번째로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한다.
비유로 감춰진 비밀을 자들은 천국에 이를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을 전후로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나눈다. 그의 탄신이 역사가 척도가 될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파급력은 엄청나다. 그런데 나는 다른 부분에서 그 파급력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타자성'이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40여 명이 기록했다고 알려진 이 성경을 인식이 아니라 인간의 이분법을 중점으로 보게 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신자와 불신자, 선과 악, 천사와 사탄. 어쩌면 인간 계급화의 시작이자, 타자성과 배타적 고립성이 그리스도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믿으면 '저희'일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너희'일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위를 추구한다. 그 위라 함은 천국이며 동시에 이항대립의 위계에서 위를 의미한다. 합리성에 대한 추구, 어쩌면 이성으로 대표되는 이항대립의 우월한 항에 대한 함축적인 종교이며 동시에 동일자와 타자의 분리를 종교적 현현(represent) 한 것이 그리스도교가 아닐까?
별개로 푸코는 주체의 계보를 쫓다가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발생한 단절을 하나 발견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기와 자기(moi)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미학을 실현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이래로 사람들은 자기와 자기의 관계보다 자기와 신의 관계를 맺기 됨으로써 존재미학이 아닌 주체(sujet)가 되었다.
푸코의 철학은 어쩌면 철저하게 반 그리스도교적인 사유가 아닐까? 주체의 문제와 타자의 문제 그리고 통치성에 대한 그의 예리한 사유는 모두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관통한다. 그가 무너뜨리려 한 근대는 어쩌면 종교의 그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시대일 수도 있다.
이철우, 「장프랑수아 리오따르 : 분쟁의 수호자」, 『현대프랑스철학사』, 창비, 2015.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입문』, 김상운 역, 아르테, 2022.
허경,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 읽기』, 세창미디어,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