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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l 30. 2024

Zip

Barnett Newman's zip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 <Cathedra>(1951)

  뉴먼의 회화에서 우린 아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예술의 본질은 아는 것의 재확인이란 저 작품 앞에선 도저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저 그림은 재현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 작품의 정보 구조를 둘로 나눌 수 있다. 루벤스의 회화를 볼 때, 우린 작품 속의 장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이게 바로 그 작품의 ‘의미 정보’다. 이제 이 내용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 나아가 그림 속에 보이는 형체들이 인물이며, 나무며, 들판이라는 사실까지 잊자. 그러면 그림 속엔 순수한 형태와 색채만이 남게 되는 게, 이게 바로 작품의 ‘미적 정보’다. 의미 정보를 중시한 고전 회화에선 형태나 색채가 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AO2, 46).


알 수 없는 것

  세잔의 사과,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 에곤 쉴레의 에로티시즘을 작품으로써 접할 때, 규정적 판단을 한다. 규정적 판단이라 함은 개별적인 것을 접했을 때, 그것을 보편적인 것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사과, 나무 혹은 에로티시즘에 대한 개념에 일회적 현상을 종속시켜서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해 낸다. 그런데 뉴먼, 로스코, 말레비치의 회화 앞에서 그런 규정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있던 개념(보편적 지식)에 포함되는 개별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인지 관람자는 규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저 그림은 무엇을 그린 것이며, 무엇을 표현했을까? 

  바넷 뉴먼의 작품에서 예술가의 예술적 솜씨를 확인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이렇다 할 기교도 기법도 없고, 심지어 예술가는 핀젤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채색에 사용된 것은 페인트용 롤러다. 여기서 전통적 의미의 예술은 존재하기를 그친다. 예술은 현실을 묘사하기를 포기하고, 이 침묵으로써 ‘이 세계에는 예술로써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리오타르의 말대로 대상을 묘사하기 포기한 현대예술은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려는 모순적 시도인지도 모른다(ML, 232). 결과적으로, 말레비치나 뉴먼의 그림들은 모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마치 감동적 경치를 묘사할 언어가 부족해 “이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어”라고 말하듯이, 마음의 정서를 그 어떤 형상으로도 제시할 수 없어 순수 색채를 그냥 화면에 칠한 것이다.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하지만 표현 불가능한 존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모든 형태를 지워버린 날것 그대로의 색칠이었다(SA, 111).

  그렇다면 이때 작품에서 미(美)를 찾을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팝아트 혹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예술이 미를 구현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를 아예 부정했다. 그런데 미를 부정하면 숭고가 남는다. 미학의 양대 영역은 미와 숭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먼은 미국의 화가들이 진정한 숭고 미학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SA, 119).

  그렇다면 숭고는 무엇인가? 한 장의 그림 앞에서 바로 그것과 접하는 체험. 나의 인식 능력으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그것과 마주치는 불편한 체험. 그것은 바로 ‘숭고’의 체험이다.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현대예술은 이 세상에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증언한다낭만주의 회화가 숭고한 대상을 그림으로써 숭고의 개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면, 모던의 아방가르드는 대상의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숭고를 ‘사건’으로 제시하려 한다(ML, 232-44). 따라서 숭고란 한마디로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은 미가 아니라 숭고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화면은 점점 아름다운 대상들을 게워내고 그 극한에서 마침내 텅 빈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AO3, 220).

  따라서 저 회화를 보고 아는 것을 확인하는 규정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판단이 있다면 아마 저 캔버스에는 형언할 수 없는 혹은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아담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정도? 바벨의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에게 아담의 언어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며, 읽을 수 없는 글이다. 또한 말할 수 없는 말이다. 따라서 추상 표현주의 회화는 하나의 증거이며, 동시에 증인이다. 증인이 증언을 캔버스에서 다음과 같이 한다. "이 세상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을 표현할 수 없어서 그 표현 불가능함을 캔버스에 남깁니다." 


부정성과 무한성

  규정적 판단의 불가능성. 어쩌면 그건 무한한 가능성의 다른 징표일지도 모른다. 모나리자의 피사체에 대한 가능성은 닫혀있다. 그건 분명히 사람이다. 다 빈치의 동성연인을 모티브로 그린 사람이던지, 귀부인을 그린 것이던지, 그것은 사람이라는 한계 안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추상화는 다르다. 

  추상의 의의는 이처럼 감상자가 대상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끔 돕는 데 있다. 예술의 배경지식을 배워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그저 점, 선, 면, 색을 자유롭게 감상하면서 영혼을 자극하는 울림을 편하게 느껴야 한다(UA, 235).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 <하나임 I>(1948)

  재현에 대한 부정과 고정되지 않은 해석은 내가 뉴먼의 회화를 볼 때마다 새롭게 느끼게 한다. 점, 선, 면, 색을 자유롭게 감상하면 추상화는 나에게 다른 말을 걸어온다. 때론 저 zip이 동일자 사이를 갈라놓는 경계와 같이 보인다. 동일자의 타자화 혹은 이성으로 대표되는 로고스 중심주의, 분열, 갈등과 같은 경계의 상징으로 보이기도 하며, 때론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한 희망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저 무(無)의 세계에서 의지할 것은 오직 가운데에 있는 zip밖에 없어 보인다. 아니면 저 zip은 혹시 접착제가 아닐까? 갈라진 둘을 이어 붙인 접착제의 흔적. 혹은 상처를 가리기 위한 보완의 흔적이 아닐까.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 추상화 앞에서 해석의 차연은 계속되며, 그 놀이가 끝났다면 예술과 사유의 종언을 암시할 것이다.

  오늘 뉴먼의 zip은 나에게 한 줄기 희망으로 보였다. 내일은 뭘로 느껴질까? 이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를 찾았다는 건 나에게 희망이 필요하다는 무의식적 시그널일까?


Reference

강은진, 『예술의 쓸모』, 다산북스, 2021. (UA)

박정자, 『숭고 미학』, 기파랑, 2023. (SA)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ML)

_____, 『미학 오디세이2』, 휴머니스트, 2022. (OA2)

_____, 『미학 오디세이3』, 휴머니스트, 2022. (O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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