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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Dec 15. 2024

자기 객관화

self-objectification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1889~1967) - <순례자>(1966)

자기 객관화, 메타인지. 시선과 구조라는 피할 수 없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이것들은 사회생활하는데 필수적인 덕목이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2500년 전 아테네라는 시공간적인 배경에만 국한되지 않고, 21세기 현재 어디에서나 유효한 경구다. 나 자신을 알라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첫째로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측면에서 다. 이 경우는 언제부턴가 유행하던 메타인지적 측면이다. 남들의 기준 혹은 거시적으로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는 것. 이것은 사회라는 세계와 지평에 놓이는 인간에게 사회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덕목이다. 얽히고 얽힌 이해관계 속에서 나의 이득만을 취할 수는 없다. 내가 남에게 내주는 것이 있어야 남도 나에게 내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경구를 이렇만 이해한다면 그건 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오히려 이해가 아니라 오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할 때 그는 시선의 폭력성과 사회와 구조라는 세계의 지평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한 자신을 알라는 타자의 지평과 가치관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으로써 자신을 이해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싫어하는 것, 내가 추구하는 것 더 나아가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지는 지 아는 것. 이것이 그가 함의한 진정한 의미다. 


자기 객관화란 우리에게 필요하다. 감정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자신이 쳐한 상황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감정에 사로잡혀서 큰일처럼 느낀다. 불안과 우울 그리고 공포라는 지평에서 무언가를 판단한다면 당연히 그 인식의 결과는 긍정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럴 땐 잠시 나를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나의 공포와 불안은 내가 처한 상황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마저도 나를 죽일 수 있는 큰 문제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관이란 단지 미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다. 그러한 주관이란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감정적인 주관은 때론 스스로 함정을 파고, 그곳에 자신을 빠지게 만든다. 


나를 보듬어주고, 온전히 사랑해 줄 수 있는 것은 자기이기에 자기 주관화가 필요하다고 과거에 글을 쓴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사유에 동의한다. 어떻게 자신만의 직관 없이 타자의 관점과 가치관으로만 나를 평가하겠는가. 나는 나인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로지 남의 관점이라면 나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타자를 바라보는 것일 거다. 하지만 나를 나만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나는 나의 관점에선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완벽이란 나의 세계에게만이며, 우린 세계를 공유하는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주관화뿐만 아니라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눈과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눈으로 동시에 내 내면을 바라봐야 한다. 내게 힘든 일은 물론 내게 힘든 일이다. 남들이 힘들지 않다고 해서 내가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건 그 사람들이 내가 아니기에 나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해서 오는 당연한 오해다. 하지만 나는 나이기에 나의 고통을 공감해 줄 수 있고, 타자의 객관으로 그 고통 속에서 불안과 염려라는 방해를 받지 않고 상황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다.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는 자기 주관화와 자기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자기 객관화를 동시에 겸비하는 것이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성과주의, 자본주의, 비교주의 등 수많은 말들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을 나열할 수 있는데, 이러한 단어들은 우리에게 자기 객관화라는 방법만을 추천하며, 나를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만든다. 남들의 성과는 온전히 남들의 것이 아니라 내가 이겨내야 할 장애물과 같은 것으로 보이게 만들며, 나의 가치관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저 남들보다 높은 숫자로 더 큰 성과를 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패배자로 만들어버린다. 객관적으로 등수를 세우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도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유하는 존재인데, 꼭 그렇게 경마장의 말처럼 해야 할까. 


글은 이렇게 쓰지만 나도 자기 객관화가 어렵다. 오히려 어려움이 닥치면 숨고 싶고, 남에게 의존하고 싶다. 하지만 지나서 다시 반추해 보면 그 상황을 다시금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당시보다 더 현명한 대안을 생각해 내며, 후회하게 되더라. 특히나 적응하는 시기인 지금은 문제가 없어도 모든 것을 감정적으로 바라보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지평이 아닌 객관적인 관점으로 내가 쳐한 상황을 바라보았을 때, 별로 큰 문제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내가 나약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도망친 자에게 낙원은 없다. 낙원은 존재하지 않기에 낙원인 것이다. 나은 지옥과 그렇지 못한 지옥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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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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