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와 현재

지금 숭고를 읽는 방법

by 오경수
<19-Ⅵ-71#206> 김환기, 1971년.

우리는 앞에서 숭고를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 대상 앞에서 작동하는 판단의 구조로 다뤘다. 칸트에게서 숭고는 상상력이 끝내 합일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순간에 발생하며, 그 실패가 곧바로 주체에게 이성의 우위를 ‘느끼게’ 만든다. 숭고는 무엇을 올바로 파악했다는 인식론적 성취가 아니라, “내 안에 이성이 있다”는 자기경험으로 귀결되는 사건이다. 현대의 숭고 논의가 재현 불가능성, 의미의 지연, 지금-여기의 발생 같은 어휘를 동원하더라도, 그 논의가 붙잡는 핵심에는 칸트적 구조와 구조적으로 유사한 지점이 있다. 숭고는 의미가 매끈하게 도착하지 않는 자리에서, 그럼에도 감각과 사유가 흔들리며 어떤 강도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다만 이 지점에서 시선을 한 번 옮길 필요가 있다. 숭고를 초월론적 조건의 언어로만 붙잡으면 우리는 “어떻게 가능한가”를 말하는 데서 멈춘다. 특히 현대미술의 경험은 작품-관람자만의 폐쇄회로가 아니라, 전시 제도와 담론, 시장의 매개 속에서 구성된다. 따라서 같은 구조가 동시대의 주체에게 어떤 심리적 효과로 체험되고, 어떤 사회적 장치를 통해 증폭·왜곡·유통되는지 또한 살펴봐야 한다. 다시 말해 숭고의 인식론적·판단론적 층위를 유지하되, 그것이 실제 경험 속에서는 정동과 욕망, 인정과 구별의 형식으로 번역된다는 점을 추가해야 한다. 이 전환을 거치면 숭고는 더 이상 ‘판단의 고도’에만 머물지 않고, 심리학·정신분석학·사회학의 층위로 이동해 주체가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방식에 개입한다.


이때 숭고를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자아도취가 된다. 난해한 대상 앞에서 상상력의 합일이 불가능해질수록, 주체는 그 불가능을 견디는 자신의 이성을 감지한다. 칸트의 숭고가 상상력의 실패를 통해 오히려 이성이 자신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경탄하는 경험이라면, 현대의 숭고는 그 구조를 유지한 채 다른 방향으로 변주된다. 현대인이 난해한 아방가르드 예술 앞에서 느끼는 숭고는 “내가 이성을 지녔다”는 확인과 함께, 그 장면에 끝까지 머무를 수 있는 나의 문화적 자격, 교양, 취향을 동시에 확인하는 경험이 된다. 주체는 작품이 아니라, 작품 앞에 선 ‘자기 자신’—그리고 그 자기 자신이 누리고 있는 문화적 생활양식—에 취한다. 그래서 숭고는 쉽게 나르시시즘이 되고, 허세로도 보일 수 있다. 숭고가 주체에게 주는 쾌감은 단지 고양의 쾌감이 아니라, 자기확증과 자기연출의 쾌감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자기확증’이 내 마음속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작품 앞에서 느낀 숭고를 곧장 말과 태도, 인용과 해석, 전시장 동선과 취향의 선택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런 표현들은 미술관, 비평, 교육, 커뮤니티, 시장 같은 여러 장치 속에서 평가되고 인정받는다. 즉 숭고는 단지 “내가 이성을 느꼈다”는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나는 이런 예술을 알아보고 이런 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다”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 순간 예술은 감각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구별의 표지가 되고, 숭고는 경험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뭘 좀 아는 사람만의 자격증 같은 표시가 된다. 그래서 숭고는 언제든 작품이 준 강렬함에서 취향의 서열로, 사유의 흔들림에서 자기과시로 미끄러질 수 있다. 그렇다고 숭고가 곧바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숭고가 왜 자주 “그거 허세 아니야?” 같은 불신을 불러오는지 설명해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Untitled - 1971.jpeg <Untitled> 김환기, 1971년.

이제 현대미술을 둘러싼 불신이 왜 생기는지도 여기서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모두가 동의하는 평가 기준이 약해질수록, “이건 왜 좋은가”를 누구나 납득할 방식으로 증명하기는 어려워지고, 대신 누가 말하느냐(권위), 어디에 속하느냐(네트워크), 어떤 말로 포장하느냐(담론)에 대한 신뢰가 앞자리에 온다. 쉽게 말해, 검증의 언어가 줄어들수록 믿음의 언어가 커진다. 게다가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점점 더 ‘미’가 아니라 ‘숭고’의 언어를 쓰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미의 문법에 익숙한 대중과 작품 사이의 거리를 더 벌려 놓는다. 미는 조화, 형식, 완결성처럼 “이렇게 보면 된다”는 비교적 분명한 길을 제공한다. 반대로 숭고는 그 길이 막히는 순간, 의미가 바로 잡히지 않는 순간, 한마디로 이해가 지연되는 상태 자체를 핵심으로 삼는다. 그래서 대중의 입장에서는 현대미술이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라기보다, 아예 이해를 거부하는 장치처럼 보이기 쉽다.


이때 숭고는 점점 현대미술 내부자들의 ‘동일자의 언어’가 된다. 작품 앞에서의 당혹과 지연을 “숭고”로 말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우리는 이 세계의 규칙을 아는 사람들이다”라는 표식으로 기능한다. 숭고는 내부자의 언어이자 엠블럼이다. 믿는 이에게는 그 엠블럼이 어떤 통과의식처럼, 혹은 계시처럼 읽히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는 종교적 도취나 폐쇄적인 신앙고백처럼 보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언어가 시장과 제도의 권위에 기대어 유통될 때,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사기처럼 의심받는 지점까지도 생긴다. 현대미술의 경계가 모호할수록, 예술을 알아본다는 능력은 더욱 쉽게 믿음의 문제로 보이고, 종교처럼 믿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예술로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감각과 사유를 갱신하는 사건이지만, 다른 이에게 그것은 그저 제테크 수단이거나 예술로 위장한 사기처럼 보인다. 결국 예술이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용인되는 절대적 실체라기보다, 시대가 구성해온 평가의 규범과 제도적 매개 속에서 무엇이 예술로 인정되는가가 계속 재편되는 역사적 실천에 가깝다.

Cathedra 1951.jpeg <Cathedra> 바넷 뉴먼, 1951년.

과거의 회화가 재현의 정확성 같은 비교적 명시적인 기준으로 옳고 그름, 훌륭함을 판정할 수 있었다면, 현재의 회화는 그런 기준 자체를 흔들거나 거부한다. 그리고 기준이 흔들린다는 것은 단지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작품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방식이 더 이상 하나의 규칙(공통의 척도)에 의해 자동으로 통일될 수 없다는 뜻이다. 판단이 규칙의 적용으로 정리되지 않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무엇이 나에게 일어났는가”—즉 경험의 강도, 불편, 당혹, 압도 같은 정동의 흔적이다. 예술이 이성의 규정에 붙들리는 순간, 그 허물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우리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규칙을 세우는 즉시, 예술은 그 규칙이 포착하지 못하는 잔여를 전면으로 끌어올려 우리를 다시 시험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숭고라는 언어를 호출한다. 숭고는 명료한 의미를 확정해 주는 해석의 열쇠라기보다, 의미가 제때 도착하지 않는 상태 자체를 경험의 구조로 붙잡아 두는 말이다. 숭고라는 말은 “이 작품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끝내 결정하기보다, 결정 불가능성 속에서도 어떤 강도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강도가 주체에게 판단과 사유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숭고라는 언어로 예술을 해석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언어가 모든 것을 하나로 번역해 주는 온전한 바벨의 언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함께 드러난다. 숭고는 합의를 생산하기보다는, 합의 불가능성 속에서도 경험과 사유가 지속된다는 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결국 숭고라는 열린 결말로 종말하고 마는 것인가? 아니면 숭고라는 장을 엶으로써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는가? 아마 동시대적 대답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면성일 것이다. 숭고는 의미의 봉합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열린 결말이고, 그 봉합 불가능성 자체를 사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새로운 지평이다. 동시에 숭고는 언제든 주체의 자기확증과 취향의 과시로 전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위험까지 포함해서—오늘의 미술이 작동하는 조건 속에서—숭고는 ‘현재’의 언어가 된다.

<No.301> 마크 로스코,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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