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언어
글의 초기에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불러온 이유는 단순히 “현대미술은 난해하다”는 상투를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그림이야말로, 현대미술이 관람자에게 무엇을 ‘보여 주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중단시키는가’—그리고 그 중단이 어떤 감상을 발생시키는가—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바로 그 ‘거의 아무것도 없음’이야말로, 우리가 미를 이해할 때 의지하던 통로들을 차단한다. 그래서 그 앞에서 우리는 이상하게도 더 쉽게 멈칫한다. 작품은 눈앞에 있는데, “무엇을 말하려는지”가 곧장 잡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막힘을 이해 부족, 교양 부족, 혹은 작가의 불친절로 돌린다. 하지만 그 막힘이 정말로 결함일까. 어쩌면 그 지점에서부터 이미 ‘미의 문법’이 아니라 ‘숭고의 문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말레비치의 작품이 강한 이유는, 이 대비를 한 장면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전통 회화에서 ‘검정’은 대개 무엇인가의 그림자이거나, 서사적 배경이거나, 형상을 돋보이게 하는 음영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목적’이라기 보다는 형상을 재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여기서 검정은 더 이상 어떤 대상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검정은 ‘그 자체로’ 버틴다. 관람자는 대상을 찾으려 하고, 의미를 조립하려 하지만, 화면은 그것을 돕지 않는다. 오히려 “도착해야 할 의미”를 계속 지연시키거나 보류한다. 이때 일어나는 멈춤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해석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감각이 계속 압력을 받는 상태다. 현대미술의 숭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성립한다. 장엄한 소재가 우리를 압도해서가 아니라, 의미가 매끈하게 정리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면서 관람자를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이 대비를 현대미술 전체에 비춰 보면, 현대 작품이 더 이상 “무엇을 그렸는가”라는 질문으로 이해되지 않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현대미술은 의미의 질서가 곧장 도착하도록 돕기보다, 그 도착을 지연시키거나 보류한다. 우리는 보통 그림을 볼 때 곧바로 의미—하이데거의 어휘로 ‘세계(Welt)’—를 찾는다. 마치 대상, 서사, 상징, 메시지와 같은. 그런데 현대미술은 그 ‘세계의 도착’을 유예한다. 대신 질료의 저항, 표면의 불균질함, 매체의 굴절, 공간과 빛의 압력 같은 것들이—미적인 요소 혹은 ‘대지(Erde)’—전면에 남는다. 이때 관람자는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이기보다, 이해가 지연되는 자리에서 감각이 흔들리는 사람이 된다. 감상자의 자리에서 경험자의 자리로 밀려나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검은 화면은 이 “밀려남”을 가장 원초적으로 보여 준다.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지조차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우리를 몰아넣고, 그 상태 자체가 하나의 감동—정확히는 숭고의 강도—로 유지된다.
피카소의 큐비즘은 그 전환을 회화 내부에서 가장 선명하게 조직한다. 전통적 회화가 세계를 하나의 시점에서 안정적으로 봉합하고, 그 봉합이 곧 아름다움의 근거가 되었다면, 큐비즘은 그 봉합을 찢어 놓는다. 대상은 ‘그럴듯하게’ 재현되지 않고, 시점은 겹치며, 형상은 단번에 통합되지 않는다. 관람자는 “무엇을 그렸는가”를 즉각 알아보는 대신, 회화가 세계를 성립시키는 방식 자체—즉 재현의 문법—을 의식하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막힘은 단순히 난해함이 아니라, 고전적 미(美)의 통로가 끊기는 경험이다. 의미가 매끈하게 도착하지 않는 그 지연은, 관람자를 안정된 감상에서 떼어내어 “그림이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 앞으로 밀어낸다.
뒤샹은 이 단절을 예술 제도와 작품의 조건으로까지 확장한다. 레디메이드는 아름다움의 규범을 충실히 구현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움이 작품의 필수 조건이라는 관습 자체를 끊어 내고, 관람자를 질문 앞에 세운다. 여기서 막힘은 더 노골적이다. “이게 왜 예술인가?”라는 물음은 곧바로 “무엇이 작품을 작품이게 하는가”로 이어진다. 제작의 숙련인가, 조형적 완결인가, 작가의 의도인가, 혹은 선택과 명명, 전시와 맥락 같은 조건인가. 뒤샹은 답을 제공하기보다, 답이 성립하는 전제를 흔든다. 그 흔들림은 곧 고전적 미가 작품을 정당화하던 방식—형식의 완결과 미적 쾌의 직접성—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피카소와 뒤샹을 통해 현대미술은 일단 하나의 바닥을 걷어낸다. “아름다움이 예술을 증명해 줄 것”이라는 바닥, “재현이 의미를 정리해 줄 것”이라는 바닥.
다만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피카소와 뒤샹을 호출하는 것은 곧장 “숭고의 예시”를 들기 위함이 아니다. 이들은 우선 고전적 미의 토대—조화, 재현, 완결된 형식, 안정된 의미 도착—를 해체함으로써, 미의 문법이 더 이상 자명하게 작동하지 않는 조건을 만든 예술가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숭고 자체라기보다, 숭고가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열어젖힌 전환의 장치에 가깝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도 이 계열에 놓인다. 그것은 ‘숭고를 묘사’하기보다, 숭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조건—의미의 도착이 중단된 자리, 형식이 봉합을 거부하는 자리—을 가장 과감하게 만들어 낸 사건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후에야 숭고의 예시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숭고는 고전적 미가 무너진 빈자리를 단순히 ‘공허’로 남겨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빈자리에서 예술 경험이 다른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뉴먼, 로스코, 리히터의 회화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회화가 더 이상 무엇을 ‘묘사’하거나 의미를 ‘전달’하는 장치가 아니라, 관람자를 하나의 장(field) 안에 세우는 사건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거대한 색면과 최소한의 분할, 상징과 서사의 길을 끊어 버리는 화면, 그리고 사진처럼 보이면서도 끝내 확정되지 않는 흐림이나 긁힘과 소거의 흔적들 속에서, 의미는 도착할 듯하다가 미끄러지고, 형식은 마침내 봉합을 거부한다. 관람자는 그 앞에서 해석을 통해 안정을 회복하기보다, 안정이 회복되지 않는 상태를 견뎌야 한다. 바로 그 견딤의 시간 속에서 감각은 과잉되거나 결여되고, 이해는 잠시 마비되었다가 다시 사유를 호출한다. 숭고는 장엄한 소재의 숭엄함이 아니라, 의미가 정리되지 않는 채로 지속되는 압력, 그리고 그 압력이 만들어 내는 강도의 이름이 된다.
따라서 현대미술 앞에서 자주 발생하는 막힘은 단순한 이해 부족이 아니라, 미의 문법이 아니라 숭고의 문법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작품이 의미를 곧장 건네지 않고, 감각적 과잉과 불투명성을 남기며, 한 번에 봉합되지 않는 경험을 지속시킬 때, 관람자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위치에서 ‘숭고를 겪는’ 위치로 이동한다. 미가 내용을 매끈하게 정리해 주는 안정의 기쁨이라면, 숭고는 정리되지 않는 것, 끝내 형식화되지 않는 것, 압도적 과잉 앞에서 생명력이 억제되었다가 다시 솟구치는 반전의 기쁨이다. 그래서 숭고는 미의 확장이 아니라, 미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움직이는 별도의 쾌, 별도의 감동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현대미술의 역할은 단순히 새로운 감각을 제공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현대미술이 관람자에게 아름다움이 아니라 숭고를 선사한다는 사실은, 예술을 다시 묻게 만든다.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작품을 작품이게 하는지—즉 작품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말레비치가 검은 사각형으로 의미의 통로를 한 번 막아 세웠다면, 피카소와 뒤샹은 그 막힘을 회화의 문법과 제도의 문법으로 확장했고, 뉴먼과 로스코(그리고 리히터)는 그 막힘이 공허로 끝나지 않도록 “의미가 도착하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예술 경험은 지속된다”는 사실을 강도의 형태로 보여 준다. 숭고는 그 강도를 통해 미학적 사유를 재개시키는 장치가 된다.
그래서 미술관은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장소라기보다, 예술의 조건을 실험하는 장소가 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넘어서는 감동—숭고—을 경험함으로써 예술이 무엇이며 작품이 성립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기 위해 그 앞에 선다. 현대미술은 그 막힘을 통해 우리를 밀어내고, 그 밀려남 속에서 오히려 예술이 아직도 사건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사건의 가장 선명한 시작점 중 하나로, 우리는 다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현대미술이 숭고를 통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즉, 의미가 도착하지 않는 자리에서조차 경험이 지속되는 방식을—가장 조용하면서도 폭력적으로 선언한 화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