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 숭고

숭고와 미의 차이

by 오경수
벨라스케스_비너스와 큐피드.jpeg <거울을 보는 비너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1647~51년.

앞에서 롱기누스에서 리오타르에 이르는 숭고의 계보를 훑었다면, 이제는 그 계보가 결국 무엇을 겨냥했는지, 즉 ‘미’와 ‘숭고’가 미학에서 어떻게 갈라지는지를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박정자는 “우리가 심미적 감동을 느끼는 대상은 ‘아름다운 것’ 혹은 ‘숭고한 것’ 두 가지이며, 우리의 미적 감동은 ‘미감’ 혹은 ‘숭고감’ 두 가지이다. 숭고는 미와 함께 미학의 양대 요소다.”라고 말한다.¹ 이 진술은 숭고를 미의 하위 범주로 두지 않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감동을 일으키는 두 개의 축으로 나란히 세운다. 미와 숭고는 모두 우리를 즐겁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은 편에 서 있지만, 그 즐거움이 도달하는 방식은 정반대에 가깝다.


미의 경험은 대체로 고요한 관조 속에서 성립한다. 대상이 조화롭고 질서정연한 형식을 가질 때 우리의 감각과 이해는 편안하게 접속되고, 우리는 그 형식을 따라가며 대상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묶어낸다. 이때 미는 질(quality)에 가깝다. 한눈에 잡히는 윤곽, 통일성, 균형 같은 형식성 안에서 상상력과 오성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결합하며, 감각과 의미가 비교적 매끈하게 맞물린다. 미가 주는 쾌는 이 과정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발생한다.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기분 좋은 활기를 얻고, 생명력은 조용히 촉진된다. 말하자면 미는 마음의 호흡을 고르게 하며, 안정된 리듬으로 우리를 즐겁게 한다.

<Stripe> 게르하르트 리히터, 2013년.

반대로 숭고는 관조가 유지되기 어려운 어떤 순간에서 시작된다. 감각이 압도되고 상상력이 한계에 부딪히며 이해가 잠시 멈추는 순간, 마음은 두려움과 경외, 긴장 속에서 일순간 억제된다. 그러나 그 억제는 단순한 좌절로 끝나지 않고, 곧이어 더 강한 생명력으로 솟구친다. 그래서 숭고의 쾌는 직접적 쾌가 아니라 부정의 통과를 거친 뒤에야 발생하는 ‘간접적 쾌’다. 숭고가 양(quantity)과 관계가 깊다는 말은 단지 크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한 번에 포괄하지 못하는 규모와 힘, 혹은 끝내 형식으로 봉합되지 않는 과잉을 뜻한다. 숭고는 전체가 한눈에 잡히지 않는 자리, 오히려 “잡히지 않음” 자체가 경험의 핵심이 되는 자리에서 나타난다. 상상력은 대상을 한 덩어리로 종합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 숭고의 감동이 자리한다. 미가 안정된 형식의 기쁨이라면, 숭고는 흔들림과 반전의 감동이다.


버크는 이 구조를 “공포는 숭고의 지배적 원리”라고 요약했다. 숭고는 실제 위험 속에서의 공포가 아니라, 위험이 예감되지만 안전하게 관조되는 거리 속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정념이다. 예컨대 쓰나미처럼 무섭게 달려오는 파도는 결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두렵고 위험하며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은 힘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눈길을 떼기 어렵고, 오히려 자꾸 바라보게 된다. 그 장면은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데도 묘한 감동을 준다. 숭고의 쾌는 이렇게 불쾌의 그림자를 전제한 채, 고통과 쾌의 경계에서 작동한다. 숭고는 긍정이 아니라 부정의 문턱을 밟고서야 쾌의 형태를 갖는다.

<Grau, Strahlen> 게르하르트 리히터, 1968년.


칸트는 이 차이를 철학적으로 정식화한다. 그는 미를 ‘형식의 조화’ 속에서 느껴지는 질의 문제로, 숭고를 ‘한계를 넘어서는 크기와 힘’의 문제로 구분했다. 미는 감각적으로 한눈에 포착되는 조화로운 형식에서 발생하지만, 숭고는 상상력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나 위력, 곧 ‘무한’의 감각에서 생긴다. 미가 우리의 감각과 이해를 정돈시키는 직접적 쾌라면, 숭고는 감각이 실패한 자리에 이성이 등장하며 느끼는 부정적 쾌다. 숭고의 감정이 경탄과 존경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음이 단지 압도당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을 자각하는 순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숭고는 더 이상 대상의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상상력과 이성이 충돌하고 재배열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관 내부의 사건이다. 거대한 폭풍이나 끝없는 밤하늘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단지 그 풍경의 크기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는 자기 한계를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자각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식한다. 숭고는 감각적 한계의 체험을 통해 이성적 자율성과 자유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미는 안정된 형식 속에서 조화의 기쁨을 주고, 숭고는 형식이 흔들리는 자리에서 긴장과 압도 속의 반전된 쾌를 제공한다. 미가 질의 조화라면 숭고는 양의 과잉이며, 미가 오성의 영역이라면 숭고는 이성의 사건이다. 미가 고요한 관조라면, 숭고는 생명력의 폭발이다.



Note

1. 박정자, 『숭고 미학』, 서울: 기파랑, 202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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