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는 사라졌는가?

Aura is gone?

by 오경수
<Ingres' Violin> 만 레이, 1924년.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 예술작품이 무엇인지 묻는 일은, 작품을 둘러싼 취향을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술이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과 가까워졌다는 인상은 부정하기 어렵다. 대중의 경제적 여건, 교육 환경, 대중매체의 보급 같은 조건들이 예술의 접근성을 넓혀왔고, 그 자체는 분명 긍정적 변화다. 그런데 오늘날 예술의 대중화와 소비를 밀어붙이는 힘은 이런 환경적 조건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나는 동시대에 대중을 예술로 응집시키는 하나의 구심력으로 ‘허세’를 호출하고 싶다. 예술을 소비한다는 표지는 교양과 안목의 표지처럼 작동하고, 우리는 그 표지를 통해 자기 자신을 연출한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일은 ㄴ아니다. 글을 쓰고 전시를 보고 예술에 대해 말한다는 행위 자체가 어느 정도의 자기연출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허세는 개인의 심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술이 ‘보이는 것’으로 유통될수록, 즉 더 자주 노출되고 더 쉽게 공유될수록, 그 표지는 더 간편하게 소비되고 더 빠르게 증폭된다. 이 지점에서 ‘대중화’는 더 이상 취향의 문제로만 남지 않고, 유통 조건의 문제로 넘어간다.


벤야민의 분석은 바로 이 전환에 붙어 있다. 대중의 취향이 바뀌었기 때문에 예술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기술이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을 바꾸었기 때문에 취향과 제도, 수용의 형식이 함께 변했다고 보는 것이다. 기술적 복제는 예술을 더 널리 퍼뜨리는 수단을 넘어, 작품이 ‘단 한 번’ 존재한다는 감각과 그에 기대어 유지되던 권위의 구조를 흔든다. 그는 기술적 복제가 작품의 “여기-지금(Hier und Jetzt)”을 약화시키며, 그 결과 예술작품에서 쇠퇴하는 핵심을 “아우라(Aura)”로 지정한다.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에 예술작품에서 쇠퇴하는 것은 그 아우라이다.”¹


아우라를 ‘원작을 감싸는 영기’로 직관적으로 말할 수는 있지만, 벤야민의 논점은 분위기 묘사에 있지 않다. 아우라는 작품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단 한 번 현존한다는 유일성과, 그 유일성이 만들어내는 거리감·권위·정동의 묶음이다. 복제기술은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에서 떼어내며,” 복제를 “증식”시키는 순간 “그것의 단 한 번의 현존 대신 대량적 현존을 놓아버린다.”²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본이 더 귀하다’는 상식이 아니라, 작품이 전통 속에서 쌓아온 역사적 증언과 권위가 구조적으로 흔들린다는 점이다. 아우라의 약화는 작품의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작품이 ‘현존하는 방식’이 바뀌어서 생긴다.


이 변화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작품을 접할 때 생기는 정동의 질감에서 더 분명해진다. 과거에 작품은 대개 ‘보기 위해 이동해야 하는 것’이었다. 성당의 성화나 궁정의 초상화를 마주하는 일은 사건이었고, 그 사건성은 경외, 긴장, 침묵 같은 정동을 불러냈다.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기 전에, ‘여기-지금’에 놓인 원본의 권위가 먼저 감각을 압도했다. 반면 오늘의 작품 이미지는 이동하지 않는다. 작품은 화면을 통해 언제든 호출되고, 다른 이미지들과 같은 속도로 스크롤된다. 그래서 정동은 경외에서 친숙함으로, 침묵에서 코멘트로, 기다림에서 즉시성으로 이동한다. 아우라의 약화란 결국 작품 자체의 ‘내용’이 빈약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관람의 조건이 바뀌면서 정동의 구조가 바뀌었다는 말에 가깝다.

만레이 - Black and white (1926).jpg <Black and white> 만 레이, 1926년.

진중권은 이 논점을 ‘진품성’의 흔들림으로 압축한다. “진품성”이라는 개념은 “위조 앞에서는 힘을 발휘해도 복제 앞에서는 무력”하며, 특히 “동시상영되는 영화예술에는 아예 원작이 없다.”³ 복제는 원작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원작의 시간적·공간적 현존성을 위협한다. 그 결과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은 예술품의 진품성”이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사물의 권위”이다.⁴ 이 대목을 오늘의 현실로 옮기면, ‘진품’이 그 자리에 정지해 있는 동안 ‘복제품’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고, 복제품들끼리 서로 상사관계를 이루며 권위의 차이를 마모시킨다. 어떤 사회에서는 하나의 진품이 가지는 희소성보다, 다수의 복제품이 만드는 유통과 노출이 더 큰 효율을 갖기도 한다. 예술이 점점 “얼마나 많이, 얼마나 쉽게, 얼마나 자주” 보이느냐의 논리로 이동한다는 말은, 바로 이 조건을 가리킨다.


이 변화는 ‘제의가치’에서 ‘전시가치’로의 이동에서 제도화된다. 벤야민은 과거에 예술작품이 제의가치의 절대적 비중 때문에 “우선 마술의 도구”가 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전시가치의 비중이 커지면서 예술작품이 “완전히 새로운 기능들을 가진 형상”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예술적 기능’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언젠가 “부수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덧붙인다.⁵ 진중권이 정리하듯 “예술이 종교의식의 모태에서 해방될수록 예술품의 예배가치는 줄어들고, 대신 전시가치는 커”진다.⁶ 전시관과 박물관 문화는 작품을 원래의 자리에서 분리해 예배가치를 약화시키고, 이 변화를 ‘아우라의 붕괴’로 표지한다.⁷


여기까지가 벤야민의 큰 줄기라면, 이제 중요한 질문은 “그 변화가 왜 정치로 이어지는가”다. 벤야민이 영화 같은 매체를 길게 논하는 이유는, 새로운 매체가 작품의 의미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지각과 수용 방식 자체를 바꾼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컷, 클로즈업, 편집, 반복과 같은 장치를 통해 지각을 ‘충격’의 리듬으로 조직하고, 관람자는 한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르기보다 연쇄적으로 밀려오는 인상 속에서 반응한다. 말하자면 예술은 이제 “무엇을 말하는가”뿐 아니라 “시선과 주의를 어떻게 배치하는가”라는 차원에서 사회적 힘이 된다. 이때 ‘정치로의 전환’은 예술이 정치 이야기를 다룬다는 뜻이 아니라, 예술이 대중의 지각과 주의를 조직하는 힘이 커진다는 뜻에 더 가깝다.


오늘의 디지털 환경은 이 전시가치를 사실상 무한대로 키워버렸다. 클릭 하나로 누구든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이미지와 영상은 끝없이 재생산된다. 그 결과 예술의 문제는 “접근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접근이 너무 쉬운 탓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가”로 이동한다. 대중은 진품보다 복제품을 훨씬 많이 접하고, 그 접촉의 과잉은 오히려 감각을 둔화시키기도 한다. 아우라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아우라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점점 더 드물고, 일상적 흐름을 끊는 사건처럼 찾아온다.

만레이 - Glass tears 1932.jpg <Glass tears> 만 레이, 1932년.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현대에 아우라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모니터에 시선을, 이어폰에 청각을 맡긴 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술을 통해 “여기-지금”의 감각을 회복하고, 어떤 방식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을까. 아우라가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면, 오늘의 반복 노출은 그 ‘먼 것’을 지워버린다. 유명인의 이미지가 언제든 재생되는 환경에서 대면의 사건성이 희미해지듯이, 작품 이미지가 언제든 호출되는 환경에서는 관람의 사건성이 희귀해진다. 결국 아우라의 문제는 예술만이 아니라, 인간적 현존 자체가 복제 가능한 장면으로 분해되는 조건에서 감각이 어떻게 조직되는가라는 문제로 확장된다. 혹은 과거의 숭고와 아우라가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가 더 큰 역치의 자극을 찾게 된 것은 아닐까. 예술의 ‘대중화’가 단지 좋은 접근성만을 뜻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술이 더 잘 보이게 될수록, 예술을 본다는 사실 자체가 ‘표지’가 되고, 그 표지를 소비하는 허세의 회로도 함께 커진다. 이때 예술은 감각을 해방하기도 하지만, 감각을 동원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벤야민이 경고하듯 “정치의 미학화에 대한 모든 노력은 한 점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 한 점은 전쟁이다.”¹⁰ 이 문장이 여전히 불편하게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가 기술복제 시대를 지나 ‘과잉 복제’의 시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Endnotes

1. Walter Benjamin,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Dritte Fassung),” in Gesammelte Schriften, Bd. I/2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0), 477.

2. Ibid.

3.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서울: 아트북스, 2003), 42.

4. Ibid., 42–43.

5. Benjamin,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Dritte Fassung),” in Gesammelte Schriften, Bd. I/2, 484.

6.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45.

7. Ibid., 46.

8. Ibid.

9. Ibid., 46–47.

10. Benjamin,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Dritte Fassung),” in Gesammelte Schriften, Bd. I/2, 506.


Bibliography

Benjamin, Walter.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Dritte Fassung).” In Gesammelte Schriften. Bd. I/2.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0. 471–508.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서울: 아트북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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