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미학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세계(Welt)와 대지(Erde)를 구분하는 이유는, 예술을 ‘미적 대상’으로 다루는 통상적 틀을 벗어나 예술작품을 하나의 존재론적 사건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작품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도, 감상자가 취향 판단을 내리는 대상도 아니다. 작품은 오히려 ‘진리’가 일어나는 자리이며, 그 진리는 명제의 ‘참/거짓’이 아니라 은폐가 풀리며 드러남이 성립하는 방식, 즉 알레테이아(alētheia)의 운동으로 이해된다.¹ 세계와 대지는 바로 이 운동이 작품 안에서 어떻게 구조화되는지를 설명하는 두 개의 축이다.
이때 결정적으로 보태야 할 층위는 ‘창조적 천재’ 도식의 해체다. 하이데거에게 작품의 진리는 예술가의 머릿속(의도·심리·표현 충동)에서 먼저 생산되어 결과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작품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예술가는 진리의 원인이라기보다, 진리가 작품 안에서 일어나도록 정초하고 그 발생이 지속되게 만드는 자리로 배치된다. 창작은 주체가 진리를 소유한 채 외부로 투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진리의 열림에 ‘속해 있으면서’ 그 열림이 형태를 얻도록 응답하는 일이다. 이 의미에서 예술가를 “영매/통로”로 비유하는 독해가 가능하지만, 그것은 초자연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진리가 본래적으로 은폐를 포함하고 인간이 전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비소유성을 강조하는 비유에 가깝다.²
세계는 단순한 배경(시대·사회 맥락)이나 작품의 ‘내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세계란 의미가 조직되고 질서가 세워지는 총체적 지평이며, 작품이 관람자를 끌어들이는 해석 가능성의 장이다. 회화에서 세계는 이미지가 호출하는 서사·역사·상징의 연쇄로 나타나고, 인물·사물의 정체성이나 제목, 도상학(ikonography)이 제공하는 해석의 길로 구체화된다. 또한 화면이 제안하는 규칙—중심과 주변, 위계, 구성의 방향, 시선의 유도—은 관람자가 “이것은 이런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도록 의미의 질서를 ‘세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작품은 세계를 ‘설치(aufstellen)’하거나 ‘열어젖히는’ 방식으로 작동한다.³ 이때 세계는 외부 맥락의 주석이 아니라 작품 내부에서 발생하는 규범적 지평이며, 관람자는 그 지평 안으로 편입되면서 의미의 네트워크를 따라 움직이게 된다.
여기서 ‘감상 주체’의 위치가 바뀐다. 세계가 열릴 때, 관람자는 작품 바깥에서 대상을 관찰하며 취향 판단을 내리는 주체로 남기 어렵다. 작품이 여는 세계는 관람자를 사건 안으로 끌어들이고, 감상자는 의미의 질서가 재구성되는 자리에서 ‘응답하는 존재’로 놓인다. 가다머가 예술 경험을 주체-객체 관계의 인식론으로 환원하지 않고, 이해와 진리가 ‘사건(Geschehen)’으로 일어나는 구조로 다시 사유할 때, 그가 염두에 둔 것도 이런 종류의 ‘열림’에 가깝다.⁴
대지는 흔히 오해되듯 ‘자연/흙/재료’ 그 자체가 아니다. 대지는 의미화에 저항하는 층위이며, 완전히 해명되거나 투명해지지 않는 바탕이다. 회화에서 대지는 물감의 점성, 두께, 균열, 얼룩, 표면의 저항으로 경험되고, 형태가 분명해지기 직전의 불투명함, 끝내 ‘무엇인지’가 닫히는 부분으로도 나타난다. 시각적으로는 분명히 주어져 있지만 언어로는 붙잡히지 않는 잔여가 남고, 작품은 마치 “설명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한 침묵과 완강함을 유지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대지는 단지 ‘아직-말해지지 않음’이 아니라, 말해짐을 원리적으로 초과하는 자기-은폐의 차원이다.⁵
이 대지의 층위는 예술가의 역할을 다시 정의한다. 예술가는 재료를 단순히 “가공해 투명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재료가 끝까지 다 말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즉 은폐의 힘—을 작품 속에서 보존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통로’란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 전달선이 아니라, 세계가 열리되 대지가 버티도록 작품을 정초하는 매개적 자리다. 메를로퐁티가 회화를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시성의 논리’로 다루며, 표현을 지각의 구조적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하려 했던 시도는, 하이데거의 대지 개념이 지키려는 이 잔여성의 의미를 보강하는 철학적 평행선을 제공한다.⁶
이제 결정적인 지점은, 하이데거에게 작품이 ‘세계 + 대지’의 합이 아니라 ‘세계 vs 대지’의 투쟁(Streit)이라는 점이다. 세계는 드러내고 질서화하며 의미를 세우려는 운동으로 작동한다. 대지는 숨기고 버티며 의미화를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투쟁은 파괴를 목표로 하는 갈등이 아니다. 오히려 이 긴장이 있어야 작품은 단순한 정보 전달도 아니고, 단순한 물질 덩어리도 아닌 예술 작품으로서의 ‘사건’이 된다. 세계가 너무 강하면 작품은 하나의 메시지로 닫혀 버리고, 대지가 너무 강하면 작품은 의미를 구성할 실마리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이 예술로서 성립하는 것은, 드러남과 은폐가 동시에 작동하는 그 중층적 자리에서 진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⁷
이 구조는 ‘감상 주체’ 중심의 미학을 정면으로 비껴간다. 근대 미학은 흔히 예술을 주체의 경험(쾌·불쾌, 취향 판단, 정서적 반응)으로 환원해 왔다. 하이데거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그 환원이다. 예술의 핵심은 내가 작품을 어떻게 느끼는가가 아니라, 작품에서 무엇이 드러나며 그 드러남이 어떻게 유지되는가이다. 여기서 진리는 해석의 결론이 아니라 해석을 가능케 하는 열림이며, 동시에 그 열림을 완전히 투명화하지 못하게 하는 은폐의 힘과 함께 작동한다. 데리다가 회화/프레임/파레르곤(parergon)을 논하면서 ‘작품을 규정하려는 경계’가 언제나 미끄러진다는 점을 붙잡는 것도, 드러남-은폐의 동시성과 경계의 불안정성을 다른 어휘로 밀어붙인 후속 독해로 읽을 수 있다.⁸
결국 세계와 대지의 투쟁은 작품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작품이 작품으로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규정한다. 세계는 관람자를 의미의 질서로 끌어들이고, 대지는 그 질서를 완전히 투명하게 만들지 않음으로써 작품을 설명으로 소진되지 않게 한다. 예술가는 이 둘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긴장이 작품 안에서 유지되도록 정초하는 사람이다. 작품은 이 긴장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열고, 동시에 그 세계의 닫힘을 지연시키며, 그 지연의 자리에서 진리가 사건으로 발생한다. 예술이 난해해지는 순간이 결함이나 불친절이 아니라, 세계가 열리면서도 대지가 버티는 자리—즉 진리가 일어나는 자리—일 수 있다는 점을 하이데거는 보여 준다.⁹
1.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1927), §44; Martin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in Holzwege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50), 21–25.
2. Martin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in Holzwege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50), 55–71; Julian Young, Heidegger’s Philosophy of Ar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chs. 1–2.
3. Martin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in Holzwege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50), 26–33.
4. Hans-Georg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Tübingen: Mohr Siebeck, 1960), Part I.
5. Martin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in Holzwege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50), 33–39.
6. Maurice Merleau-Ponty, “Le doute de Cézanne,” in Sens et non-sens (Paris: Nagel, 1948); Maurice Merleau-Ponty, “L’œil et l’esprit,” in L’œil et l’esprit (Paris: Gallimard, 1964).
7. Martin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in Holzwege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50), 39–48.
8. Jacques Derrida, La vérité en peinture (Paris: Flammarion, 1978); Jacques Derrida, The Truth in Painting, trans. Geoff Bennington and Ian McLeo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Parergon.”
9. Giorgio Agamben, The Man Without Content, trans. Georgia Alber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chs. 1–2; Julian Young, Heidegger’s Philosophy of Ar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ch. 3.
Agamben, Giorgio. The Man Without Content. Translated by Georgia Alber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Derrida, Jacques. La vérité en peinture. Paris: Flammarion, 1978.
Derrida, Jacques. The Truth in Painting. Translated by Geoff Bennington and Ian McLeo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Gadamer, Hans-Georg. Wahrheit und Methode. Tübingen: Mohr Siebeck, 1960.
Heidegger, Martin.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1927.
Heidegger, Martin.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In Holzwege. 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1950.
Merleau-Ponty, Maurice. “Le doute de Cézanne.” In Sens et non-sens. Paris: Nagel, 1948.
Merleau-Ponty, Maurice. “L’œil et l’esprit.” In L’œil et l’esprit. Paris: Gallimard, 1964.
Young, Julian. Heidegger’s Philosophy of Ar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