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ter's painting and delay in meaning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오늘날 동시대 미술, 특히 전후 회화의 지형을 논할 때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작가다. 그는 단순히 유명한 화가이거나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후 회화가 직면한 거의 모든 핵심 문제—재현과 추상, 사진과 회화, 역사와 기억, 주체와 매체, 우연과 통제—를 자신의 작업 안에서 가장 집요하고도 복합적으로 밀어붙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흔히 20세기 미술사는 매체의 자율성, 재현의 위기, 이미지의 범람, 회화의 종언과 같은 명제들로 서술되어 왔다. 그러나 리히터의 작업은 그러한 선언들을 단순히 확인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회화가 끝났다는 명제가 얼마나 성급한지, 또 회화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 역시 얼마나 쉽게 공허한 수사가 될 수 있는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 점에서 리히터는 하나의 양식을 대표하는 작가라기보다, 회화라는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끝까지 시험한 작가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미술사 안에서 그의 위상은 어떤 사조의 완성자라기보다, 서로 상충하는 미술사적 언어들을 한 작업 세계 안에 병치하고 충돌시키며, 그 긴장 자체를 동시대 회화의 조건으로 정립한 데서 형성된다.
그러한 리히터를 한 문장으로 붙잡으려는 시도는 대개 실패한다. 그는 어떤 양식으로도 온전히 귀속되지 않고, 하나의 언어로도 다 담기지 않는다.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 우연과 통제, 기억과 망각 같은 서로 충돌하는 범주들이 그의 작업 세계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공존한다. 그래서 리히터를 설명할 때 “무엇을 그렸는가”라는 질문은 자주 빗나간다. 그보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회화로 하여금 어떻게 의미를 곧장 ‘도착’시키지 못하게 만드는가. 어떻게 회화가 의미를 말하기보다는 의미가 고정되는 순간을 늦추고, 미끄러지게 하고, 유보하게 만드는가.
리히터의 삶은 전후 독일의 균열 위에 놓여 있다. 1932년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그는 나치와 전쟁, 분단을 개인의 시간으로 통과했고, 이 역사적 조건은 단순한 연보의 사실이 아니라 이미지가 “증언”이 될 때 발생하는 불편함과 윤리적 난점을 그의 작업 내부로 밀어 넣는 장치처럼 남아 있다. 전후 동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경험한 뒤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직전 서독으로 이동한 이력은 지리적 이동이라기보다 감각의 체제가 바뀌는 이동에 가깝다. 같은 ‘그림’이 한쪽에서는 선전의 도구이고, 다른 쪽에서는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 이른 시기에 체득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처음부터 ‘표현’이라기보다 ‘의심’의 형식으로 시작된다.
이 의심이 미술사 안에서 처음 뚜렷한 언어를 얻는 지점이 1960년대 초 서독의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다. 이 용어는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단순한 반대말이 아니라, 전후 서독에서 현실이 더 이상 “현장”이라기보다 “이미지-상품-미디어가 조립한 환경”으로 체험되기 시작했다는 진단에서 나온다.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현실로 믿게 되는지를 조직하는 체제라는 뜻이다. 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명확한 서사, 식별 가능한 형상, 이념적 합의의 생산을 목표로 했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현실을 구축한다. 의미는 과잉 이미지 속에서 자동화되고, 설득은 반복과 노출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리히터는 이 자동화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던지기보다, 그 자동화의 논리를 회화의 내부로 이식한다. 다시 말해 그는 회화를 “진실을 말하는 매체”로 유지하기보다, “진실의 외양—선명함, 증거성, 권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가”를 드러내는 장치로 바꾼다. 여기서 그의 회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메시지가 너무 쉽게 ‘도착’하는 순간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관점에서 리히터의 사진회화는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과 구분되어야 한다. 표면적으로 두 경향은 사진을 참조한다는 점에서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포토리얼리즘이 주로 사진의 디테일과 광학적 정확성을 회화로 재현함으로써 “사진처럼 보이는 회화”의 기술적 성취를 강조한다면, 리히터는 사진을 닮게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진이 생산하는 사실효과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 사진을 사용한다. 포토리얼리즘에서 사진은 재현의 표준(정확성의 척도)으로 작동한다. 반대로 리히터에게 사진은 ‘이미 현실을 대체한 이미지’이며, 그 이미지가 너무 손쉽게 권위를 획득하는 방식이야말로 문제다. 그래서 그의 사진회화는 사진이 제공하는 ‘증거’와 ‘기록’의 느낌을 호출한 직후, 회화적 마찰을 더해 그 증거가 결론으로 굳어지는 지점을 늦춘다. 관람자는 분명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확신을 얻지만, 그 확신을 곧장 “안다”로 번역하는 지점에서 멈칫한다. 리히터의 사진회화는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사실이 ‘사실처럼’ 굳는 과정을 미끄러지게 한다.
이 미끄러짐을 가장 응축된 방식으로 수행하는 기술이 블러링(blurring)이다. 블러링을 단지 “흐릿한 스타일”로 설명하면 핵심을 놓친다. 블러링은 인식론적·매체론적·윤리적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하며, “의미의 도착 지연”을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한다.
첫째, 인식론적 층위에서 블러는 ‘보임’을 ‘앎’으로 환원시키는 지름길을 차단한다. 우리는 윤곽을 감지하고 형태를 읽어내지만, 그 읽기가 개념적 결론으로 닫히지 않는다. 시각은 작동하는데 판단이 뒤따라붙지 못한다. 상상력은 계속해서 형상을 완성하려 하고, 오성은 그것을 붙잡아 줄 개념을 찾으려 하지만, 화면은 양쪽 모두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이때 지각은 어떤 의미에 도달한 듯하다가도, 다시 미끄러져 ‘도달 이전’으로 돌아간다.
둘째, 매체론적 층위에서 블러는 사진의 권위를 회화가 가로채면서도 그 권위를 확정적으로 승인하지 않는 방식이다. 사진은 “이것이 실제로 있었다”는 인덱스적 효과를 갖는다. 그런데 리히터의 회화는 사진을 참조함으로써 그 효과를 호출하고, 곧이어 흐림과 문지르기라는 회화적 개입으로 그 효과를 약화시킨다. 사진의 확실성은 남아 있는 듯하지만, 회화가 만든 저항(마찰)이 그 확실성을 최종판으로 만들지 못하게 한다. 이때 회화는 사진을 모방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생산한 ‘사실성’이 얼마나 매끈하게 권위를 얻는지, 그리고 그 권위가 얼마나 취약한지 동시에 보여주는 장이 된다.
셋째, 윤리적 층위에서 블러는 감정과 서사가 과잉으로 고정되는 재현의 유혹을 경계하게 만든다. 특히 역사적 이미지나 사적인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곧장 “이 장면은 이런 의미다”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리히터는 그 말이 얼마나 쉽게 폭력으로 바뀌는지—복잡한 사태를 단일한 감동과 단일한 교훈으로 압축해 버리는 폭력—를 의식한다. 블러는 결핍이 아니라 태도다. 그는 감정을 없애기보다 감정이 결론으로 닫히지 않게 만들고, 서사를 막기보다 서사가 너무 빨리 완성되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흐림은 “덜 보여주기”가 아니라 “너무 빨리 이해하지 말기”를 강제하는 장치다.
이제 질문은 “우리는 리히터의 회화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로 확장된다. 이 물음은 한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는 문제를 넘어, 오늘날 회화라는 매체가 여전히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리히터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말한 오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합일로서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경험하기 어렵다. 칸트에게서 미적 판단은 개념에 종속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질서한 감각의 혼란도 아니다. 그것은 오성과 상상력이 서로를 강제하지 않은 채 조화롭게 유희하는 상태다.¹ 그러나 리히터의 회화에서 이 조화는 끝내 안정되지 않는다. 상상력은 끊임없이 작동하지만, 오성은 그것을 붙잡아 줄 개념적 토대를 발견하지 못한 채 공중에 머문다.
이때 리히터의 회화에서 기표(signifiant)는 기의(signifié)라는 ‘대지’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의미는 항상 도래할 것처럼 보이지만,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한 혼란이나 실패가 아니라, 리히터 회화가 의도적으로 구축한 조건이라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미가 확정되는 순간을 끝없이 지연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 결과 그의 회화는 끝없는 차연(différance)이 발생하는 장(field)으로 기능한다.² 의미는 생성 중이지만 완성되지 않는다.
이를 위와 같은 작품으로 환기해볼 수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형상은 즉각적인 서사를 요청한다. 우리는 ‘모성’이라는 익숙한 기의를 호출하고, ‘가족’이라는 정서적 프레임을 덧씌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블러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개입한다. 이 여인은 과연 누구인가. 사랑으로 아이를 감싸 안는 어머니인가, 연민의 주체인가, 혹은 ‘아이’라는 전제 자체가 우리의 해석적 습관에서 비롯된 억측인가. 빨간 천에 감싸인 형상이 생명체라는 가정조차 확언할 수 없다. 리히터의 화면은 우리가 “아는 것”을 늘 “아는 척”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이 화폭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석이라기보다 추측이며, 판단이라기보다 망설임이다. 제목과 담론이 도와주는 듯하다가도 끝내 침묵하는 순간, 남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유예다. 그 유예는 무책임이 아니라, 너무 쉽게 확정되는 의미가 낳는 폭력을 피하려는 윤리적 태도로 읽힐 수 있다. 그의 회화가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 빨리 이해하지 말라”는 경고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구상회화는 닫힌 세계로 이해되어 왔다. 대상은 화면 안에서 재현되고, 의미는 일정한 방향으로 수렴한다. 그러나 리히터는 이 닫힌 형식 안에서 열린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는 비확정적 해석의 상태를 지속시킴으로써, 유한한 형상 속에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때 무한은 형이상학적 초월이 아니라, 해석이 멈추지 않는 상태 그 자체다. 리히터는 회화를 하나의 주장이나 메시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열려 있는 질문의 장으로 이해해 왔다.³ 그의 작품은 감각적으로는 인지되지만 이성적으로는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정확히 말할 수 없고, 무언가가 존재하는 듯 느끼지만 존재한다고 확언할 수 없다. 이 모호함은 결핍이 아니라, 리히터 회화의 존재 방식이다.
추상 회화에서 이 태도는 더욱 물리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리히터를 ‘추상표현주의’로 분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비교의 좌표로 삼으면 그의 특성이 선명해진다. 미국적 추상표현주의에서 핵심 가치는 흔히 주체의 내면, 제스처, 진정성, 숭고한 스케일, ‘지금-여기’의 사건성이다. 붓질은 내면의 흔적이며, 화면은 주체의 심리적 진실이 표면화되는 장으로 읽힌다. 리히터의 스퀴지 회화는 제스처를 갖지만, 그 제스처는 ‘표현’이라기보다 ‘절차’에 가깝다. 그는 색을 고르고 구조를 계획하지만, 밀대로 물감을 밀고 긁어내는 순간 결과를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 물감층은 섞이고 끌려가며 아래층이 드러나고, 우연의 흔적이 표면을 지배한다. 이때 화면의 사건성은 주체의 고백이 아니라, 물질과 기술이 만들어내는 비인칭적 사건이다. 덮이고 지워지고 다시 드러나는 층위는 시간의 흔적처럼 보이고, 색은 상징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의미는 중심을 향해 수렴하기보다 표면 위를 미끄러지며 이동한다. 그의 추상은 감정의 폭발이라기보다 통제와 우연이 충돌하는 현장의 기록이며, 그 기록은 언제나 “다르게 될 수 있었던” 가능성을 포함한 채 남는다. 여기서도 회화는 의미를 ‘도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의 소유권을 해체하고, 해석의 결론을 늦춘다.
Album photos (sheet 1) from the series Atlas, by Gerhard Richter. 1962–66. Collaged photographs, 51.7 by 66.7 cm. (© The artist; Lenbachhaus, Munich).
리히터의 작업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축은 《아틀라스(Atlas)》다. 수천 장의 사진과 스케치, 신문 이미지, 개인적 기록을 패널 형태로 배열한 방대한 아카이브이자, 작업 과정 그 자체를 작품으로 드러내는 장치. 《아틀라스》는 자료처럼 보이지만 자료의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여기에는 설명도 결론도 없다. 이미지들이 그리드 안에 놓이면서 어느 하나도 중심이 되지 못하고, 의미는 자연스럽게 분산된다. 단일 이미지가 제공하던 즉각적 이해는, 다수 이미지가 동시에 제시되는 순간 멈추고 관계만 남는다. 중요한 것은 이 관계가 “올바른 해석”으로 수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틀라스》는 해석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해석이 결론으로 닫히는 것을 방해한다. 이 배열은 블러링과 같은 기능을 다른 방식으로 수행한다. 블러가 한 이미지 내부에서 선명도를 낮춰 의미의 도착을 늦춘다면, 《아틀라스》는 이미지의 다중성과 배열의 분산을 통해 “도착할 곳 자체”를 흩트린다.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떻게 함께 놓이느냐가 중요해지고, 의미는 한 점에 착지하지 못한 채 배치 사이를 떠돈다. 결과적으로 리히터에게서 회화와 아카이브는 대립하지 않는다. 둘 다 의미가 너무 빨리 굳어지는 것을 막는, 서로 다른 속도의 지연 장치다.
이 모든 것이 모일 때, 리히터를 ‘카멜레온’으로 부르는 비유는 충분치 않다.⁵ 그는 스타일을 바꾸는 작가가 아니라, 스타일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작가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이미지 체제의 자동화를 의심하고, 포토리얼리즘과 달리 사진의 사실효과를 흔들며, 블러링으로 인식·매체·윤리의 층위에서 도착을 지연시키고, 《아틀라스》로 중심을 제거해 의미의 착지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스퀴지 추상으로 의미의 소유권을 물질적 과정 속에 흩뿌린다. 그는 회화가 답을 제공하는 매체가 아니라 질문이 지속되는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리히터의 회화는 늘 약간 불편하다. 너무 선명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추상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회화는 여전히 유효한 매체로 남는다. 모든 것이 빠르게 해석되고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이미지의 시대에, 리히터는 이미지를 다시 느리게 만든다. 그의 그림은 친절한 결론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왜 그것을 그렇게 빨리 이해하고 싶어 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단면화에 반드시 구상을 담아야 할까”라는 질문 역시 리히터에게서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로 바뀐다. 그림이 무언가를 ‘남긴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언어로 번역 가능해야 하고, 개념적으로 정리 가능해야 하며, 이성적으로 파악될 수 있어야만 하는가. 리히터의 회화는 이 요구 자체를 유보한다. 본질이 결여된 듯 보이는 회화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념이나 감정에 대한 보편적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답이 될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나의 세계에서만 성립하는 진리다.
여기서 “무(Néant) 위에서 부유하는 기표”라는 표현은, 그의 회화가 의미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귀속을 끊임없이 미끄러지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이 말하듯, 색과 형상은 언제나 맥락 속에서만 작동한다. 누군가는 파란색에서 냉정함을, 또 다른 이는 슬픔과 미완을 읽어낸다. 리히터는 이 의미 작용의 상대성과 우연성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Stripe〉(2013)의 색채 띠들은 정지된 사물이 아니라 옆으로 통과하는 현상처럼 보이고, 우리는 색을 ‘본다’기보다 색이 지나가는 흔적을 목격한다. 이때 색은 더 이상 표상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의미는 구조 속에서 계속 차연되고, 회화는 해방된 가능성으로 남는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부재가 아니라, 해석이 결론으로 닫히지 못하도록 만드는 구조다.
결국 리히터의 예술은 판단하며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반항이자, 정치적·미학적 판단의 유보를 요청하는 제스처다.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⁶ 그러나 그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질문이 멈추지 않는 조건을 확보하는 침묵이다. 리히터의 작품이라는 시니피앙은 본질과 해석이라는 시니피에에 예속되지 않음으로써 무한한 차연의 장을 형성하고, 동시에 비확정성 속에서 이성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하나의 헤테로토피아가 된다.⁷ 이곳에서 회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이 계속되도록, 의미가 너무 빨리 도착하지 않도록, 우리를 그 지연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1. Immanuel Kant, Critique of Judgment, trans. Werner S. Pluhar (Indianapolis: Hackett, 1987), §§1–9.
2. Jacques Derrida, “Différance,” in Margins of Philosophy, trans. Alan Bas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1–27.3. Gerhard Richter, Writings 1961–2007, ed. Dietmar Elger and Hans Ulrich Obrist (New York: D.A.P., 2009), 36–38.
4. Martin Heidegger,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in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 Albert Hofstadter (New York: Harper & Row, 1971), 15–86.
5. 진중권,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서울: 휴머니스트, 2011), 214–218.
6. Ludwig 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ans. C.K. Ogden (London: Routledge, 1922), proposition 7.
7. Michel Foucault, “Des espaces autres,” Architecture / Mouvement / Continuité (October 1984): 46–49.
Derrida, Jacques. Margins of Philosophy. Translated by Alan Bas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Foucault, Michel. “Des espaces autres.” Architecture / Mouvement / Continuité (October 1984): 46–49.
Heidegger, Martin.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lated by Albert Hofstadter. New York: Harper & Row, 1971.
Kant, Immanuel. Critique of Judgment. Translated by Werner S. Pluhar. Indianapolis: Hackett, 1987.
Richter, Gerhard. Writings 1961–2007. Edited by Dietmar Elger and Hans Ulrich Obrist. New York: D.A.P., 2009.
Wittgenstein, Ludwig.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anslated by C.K. Ogden. London: Routledge, 1922.
진중권.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서울: 휴머니스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