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논쟁

하이데거, 샤피로, 데리다가 본 고흐의 구두

by 오경수

<구두 세 켤레> 반 고흐, 1886년.


고흐의 구두를 둘러싼 하이데거와 샤피로의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그 신발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소유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쟁이 진행될수록 핵심은 소유권이 아니라 예술작품의 의미가 어디에서 오며, 해석은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한다. 한 켤레의 구두는 단지 정물의 소재가 아니라, 예술의 진리와 해석의 근거를 드러내는 사건이 된다.¹


하이데거에게 고흐의 구두는 사물이라기보다 도구(Zeug)다. 도구는 단순히 눈앞에 놓인 물체가 아니라, 언제나 어떤 사용과 습관, 노동과 환경 속에서만 도구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하이데거가 구두를 바라보는 방식은 “무엇을 닮았는가”라는 재현의 질문이 아니라 “이 도구가 어떤 세계를 열어 보이는가”라는 존재론의 질문이다. 닳고 구겨진 가죽, 무게감, 오래 신은 흔적은 장식이나 취향의 표지가 아니라 노동과 반복의 시간을 가리킨다. 구두는 흙길과 비, 진창, 피로와 생계의 압박 같은 삶의 조건들을 함께 불러오며, 그 조건들이 하나의 세계로서 작품 속에서 열린다. 하이데거가 예술을 “진리가 작품 속에서 작동하게 되는 것(Art is truth setting itself to work)”이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진리는 판단과 대상의 일치가 아니라 은폐가 풀리며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이다.²


이 관점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농부 여인”은 역사적으로 확정된 소유자를 지시한다기보다, 구두가 열어 보이는 세계를 가장 전형적으로 붙잡는 형상으로 기능한다. 그 형상은 하나의 논증 장치다. 도구가 도구로 드러날 때 그 도구가 속한 세계가 함께 열린다는 구조를 가장 강하게 보여주기 위해, 하이데거는 구두를 농촌 노동의 삶과 결합시키고 그 삶을 대표하는 형상을 호출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전형적 형상은 존재론적 서술을 선명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확증되지 않은 특정’이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샤피로는 바로 이 지점을 공격한다. 미술사학자인 샤피로에게 문제는 단순하다. 왜 그 신발이 ‘농부 여인’의 것이라고 단정되는가. 그 단정을 지지하는 문헌적, 전기적, 시대적 근거가 있는가. 샤피로의 비판은 하이데거의 진리론 자체를 철학적으로 반박하기보다, 해석이 지켜야 할 책임의 규칙을 요구하는 데 있다. 작품 해석은 얼마든지 깊어질 수 있지만, 그 비약은 작가의 삶과 제작 정황, 유사 작품군, 동시대 맥락 같은 검증 가능한 근거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통제의 관점에서 볼 때, 고흐의 구두는 농촌 노동의 ‘본질’을 증언하는 물건이기보다 작가 개인의 경험과 정동, 궁핍과 집착이 응축된 “개인적 대상(personal object)”일 수 있다. 샤피로는 구두를 반 고흐의 것으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의미의 방향을 ‘농촌의 세계’에서 ‘작가의 삶’으로 옮겨 놓는다.³

가죽 나막신 (1889).jpg

<가죽 나막신> 반 고흐, 1889년.


이렇게 보면 논쟁은 “세계의 드러남”과 “근거에 의한 통제”의 대립처럼 정리된다. 그러나 데리다의 개입은 대립의 구도를 유지하면서도 초점을 한 번 더 이동시킨다.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옳은지 샤피로가 옳은지를 판정하지 않는다. 대신 둘이 공유하는 더 근본적인 전제, 곧 그림 속 신발이 온전한 ‘한 쌍’이며 따라서 의미를 어떤 기원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는 전제 자체를 의심한다. 하이데거와 샤피로는 서로 다른 곳으로 신발을 돌려보내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는 둘 다 “되돌려주기(restitution)”의 욕망을 공유한다. 작품의 의미를 하나의 주인, 하나의 원천, 하나의 맥락으로 회수해 안정시키려는 충동이 그 욕망이다. 데리다는 그 욕망이야말로 해석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신발이 정말 한 쌍인지, 혹은 두 짝 다 왼쪽이거나 오른쪽인지조차 확정 불가능하다는 문제제기는, “누구의 신발인가”라는 질문을 단순히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니라, 동일성과 기원에 기대는 해석의 틀 자체를 흔든다.⁴


이때 예술작품의 진리는 더 이상 한 번에 현전하는 결론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진리는 차이 속에서 미뤄지고 다른 기호들로 흩어지며, 최종적 봉합을 거부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난다. 진중권이 정리하듯, 존재는 차이 속에서 의미를 연기하며 산포되고, 모방해야 할 원본이 부재한다면 작품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단 하나의 해석도 성립하기 어렵다.⁵ 그렇다면 고흐의 구두는 어떤 ‘진실’을 전달하는 기호라기보다, 해석들이 서로 충돌하고 미끄러지며 끝내 하나로 결착되지 않는 지점을 보존하는 장소가 된다. 예술작품은 단순히 “해석학적 대상”이 아니라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의 보존”으로 이해될 수 있다.⁶


결국 이 논쟁은 신발의 주인을 찾아 의미를 안정시키는 싸움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구두라는 도구에서 세계가 열리는 사건을 보았고, 샤피로는 그 사건이 근거 없는 단정으로 비약하는 순간 해석이 투사로 변한다고 비판했으며, 데리다는 아예 ‘되돌려주기’의 충동과 동일성의 전제를 흔들어 예술작품의 진리가 단일한 현전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한다. 그래서 고흐의 구두가 던지는 질문은 “누구의 것인가”보다 “왜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누군가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가”에 더 가깝다. 그 질문은 예술작품을 해석하는 우리의 습관을 되비추며, 해석이 기대는 근거와 욕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Endnotes

1. Martin Heidegger,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in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 Albert Hofstadter (New York: Harper & Row, 1971), 15–86; Meyer Schapiro, “The Still Life as a Personal Object—A Note on Heidegger and Van Gogh,” in The Reach of Mind: Essays in Memory of Kurt Goldstein, ed. Marianne L. Simmel (New York: Springer, 1968), 203–209; Jacques Derrida, The Truth in Painting, trans. Geoff Bennington and Ian McLeo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255–382.

2. Heidegger,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71.

3. Schapiro, “The Still Life as a Personal Object—A Note on Heidegger and Van Gogh,” 203–207.

4. Derrida, The Truth in Painting, 255–294.

5.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서울: 아트북스, 2003), 141.

6. ibid., 141.


Bibliography

Derrida, Jacques. The Truth in Painting. Translated by Geoff Bennington and Ian McLeo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Heidegger, Martin.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In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lated by Albert Hofstadter. New York: Harper & Row, 1971.

Schapiro, Meyer. “The Still Life as a Personal Object—A Note on Heidegger and Van Gogh.” In The Reach of Mind: Essays in Memory of Kurt Goldstein, edited by Marianne L. Simmel, 203–209. New York: Springer, 1968.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서울: 아트북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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