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 Portrait, 1967, mixed techniques on paper, 26.5 x 20 cm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동’이다. 붓을 들고, 대상을 정하고, 선과 색을 고르고, 화면을 끝까지 완성하려고 결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보며 흔히 “그릴 수 있다는 건, 아직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예술 활동은 종종 주체의 지속, 정신의 안정과 연결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반대로도 보게 됐다. 사람의 정신은 언제나 단단한 중심을 갖고 있지 않다. 예술가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완벽한 주체라고 말하기 어렵다.¹ 그렇다면 질문이 바뀐다. 정신의 중심이 흔들릴 때, 예술은 무엇을 붙잡는가. ‘완전한 나’를 붙잡는가, 아니면 나를 이루게 하던 최소한의 방식—그리는 습관과 규칙—을 붙잡는가.
우터몰렌의 의의는 ‘자아’를 내용으로 증명하려 하기보다, 자아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형식(규칙과 습관)이 어떻게 끝까지 남는지를 보여준 데 있다. 그래서 그의 말년 자화상은 ‘완성된 얼굴’이 아니라 ‘얼굴을 성립시키려는 시도’의 연속이 된다.
Blue Skies, 1995, oil on canvas, 152 x 122 cm
1995년 〈Blue Skies〉는 그 흐름의 초입에 놓인다. 화면은 크게 비어 있고(황토색), 바닥은 짙은 파랑으로 평평하게 깔려 있다. 깊이가 느껴지기보다, 색면이 공간을 ‘막아’ 세운다. 노란 탁자에 앉은 인물은 화면 아래로 작게 밀려 있다. 손은 컵을 쥐고 있지만, 동시에 탁자 모서리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쪽의 기하학적 구조물은 하늘창 같으면서도, 실제 빛이라기보다 세계를 정리하려는 ‘도식’처럼 느껴진다.
이 그림이 남기는 핵심은 정서가 아니라, 세계가 ‘공간’에서 ‘배치’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감각이다. 세계가 살아 있는 공간이라기보다, 정리된 색면의 배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럴 때 얼굴도 ‘표정’이라기보다 ‘정렬 가능한 형태’로 기울 수 있다. 작가 아카이브가 이 작품을 진단 직후의 마지막 대형 작업으로 소개하며 이후 변화를 예고하는 분기점으로 다루는 이유도, 이 방향이 이미 그림의 공간감 속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²
Self Portrait (with Easel Yellow and Green), 1996, oil and pencil on paper, 46 x 35 cm
1996년 〈Self Portrait (with Easel Yellow and Green)〉에서는 그 변화가 얼굴 안으로 들어온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프레임이다. 녹색 선들이 창틀이나 이젤처럼 화면을 나누고, 얼굴은 그 틀 안에 “걸린” 것처럼 놓인다. 여기서 프레임은 배경이 아니라, 얼굴을 얼굴로 유지시키려는 ‘버팀대’다.
얼굴은 노란색으로 강하게 칠해져 존재감은 크다. 하지만 눈은 서로 정확히 맞물리지 못하고, 시선도 비껴 있다. 이때부터 자화상은 ‘나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나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된다. 보는 사람도 감정을 읽기보다, 얼굴이 어떻게든 ‘맞춰지길’ 바라며 화면을 따라가게 된다. 다시 말해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닮았는가”가 아니라 “닮게 만들던 규칙을 어떻게 붙잡는가”다. 우터몰렌은 닮음의 결과를 내놓기보다, 닮음을 가능하게 했던 최소한의 규칙을 끝까지 호출한다. 그 호출이 바로 회화적 행위로 남는다.
Self Portrait (Green), 1997, oil on canvas, 35.5 x 35.5 cm
Self Portrait (with Saw), 1997, oil on canvas, 35.5 x 35.5 cm
1997년 〈Self Portrait (Green)〉은 아직 인물화의 무게가 남아 있다. 검은 배경과 초록 상의가 화면을 눌러주고, 얼굴에는 덧칠과 긁힘의 흔적이 있어 살의 질감이 느껴진다. 표정은 자신감이 아니라 피로에 가깝다. 닮았다는 느낌은 남아 있지만, 그 닮음이 자연스럽게 굳어지는 힘은 약해진다. 얼굴이 단단히 ‘결정’되지 않고, 조금씩 흘러내리는 듯 보인다. 이 지점에서 초상은 성격을 바꾼다. 인물의 내면을 전달하는 창이라기보다, 얼굴이 성립하는 조건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같은 해 〈Self Portrait (with Saw)〉에서는 그 불안이 더 노골적이다. 색면은 현실의 공간을 만들기보다, 서로 충돌하는 표지판처럼 화면을 쪼갠다. 얼굴은 그 사이에 끼어 덧대어진 조각 같다. 톱은 단순한 소품이라기보다, 자아가 흔들릴 때 기대게 되는 마지막 조건—작업의 도구, 제작의 환경—을 끌어들이는 장치로 보인다. 자화상이 내면을 고백하는 창이 아니라, 외부의 지지대를 화면 안으로 계속 불러오는 구조로 바뀐다. 여기서 ‘쇠퇴’는 단순한 결손이 아니다. 오히려 회화가 무엇으로 성립하는지—경계, 구성, 공간의 질서—를 더 큰 소리로 드러내는 형식의 변화다.
Self Portrait (with Easel), 1998, oil on canvas, 35.5 x 25 cm
Erased Self Portrait, 1999, oil on canvas, 45.5 x 35.5 cm
1998년 〈Self Portrait (with Easel)〉은 그 “호출”이 압박으로 변하는 지점이다. 빨강·초록·노랑이 화면을 강하게 나누고, 얼굴은 붉은 사각 프레임 안에 전시된 대상처럼 놓인다. 프레임은 보호가 아니라 구속처럼 느껴지고, 고정하려 할수록 얼굴의 질서는 더 쉽게 흐트러진다. 프레임이 강해질수록 얼굴은 더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안정해 보인다. “붙잡으려는 힘”과 “흘러내리는 형식”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1999년 〈Erased Self Portrait〉에서는 그 흐트러짐이 더 분명해진다. 주변 요소들이 더 이상 배경으로 물러나지 않는다. 얼굴과 같은 층위에서 버티며 들어온다. 전경과 후경의 구분이 약해지고, 시선은 머물 곳을 잃는다. 우리는 인물을 “본다”기보다, 보려는 눈이 어디에 기대야 하는지 계속 실패한다—그리고 그 실패가 작품의 경험이 된다. 우터몰렌은 이 지점에서 관람의 방식 자체를 바꾼다. 공감이나 해석보다, 복원과 정렬을 시도하게 만들고, 그 시도를 끝내 성공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은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행위가 흔들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작이 의학교육에서 알츠하이머 진행에 따른 자기 표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³
Head I (August 30 2000), pencil on paper, 40.5 x 33 cm
Erased Head I, 2001, pencil on paper, 24 x 16 cm
2000년 〈Head I (August 30 2000)〉에 오면, 얼굴은 거의 “구성의 흔적”만 남는다. 연필 선은 외곽을 몇 번이고 더듬지만 끝내 닫히지 않는다. 하나의 검은 점(눈처럼 보이는 것)과 굵은 선(얼굴을 가르는 축)이 화면을 지배한다. 여기서 얼굴은 표정이 아니라 ‘좌표’가 된다. 얼굴을 설명하는 정보가 줄어들수록, 남는 것은 구조를 만들려던 시도 자체다. 다시 말해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어떻게라도 그리려 했는가”가 전면으로 나온다.
2001년 〈Erased Head I〉는 더 급진적이다. 그린 것보다 지운 것이 더 많은 초상이다. 남아 있는 것은 번진 흑연, 흐릿한 윤곽, 비어 있는 자리다. 이 그림은 “나를 보여준다”기보다 “나를 가능하게 했던 규칙이 여기까지 왔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움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남아 있는 형식 그 자체가 된다. 실제로 말년 드로잉들이 의학 저널(The Lancet)에 소개되어 ‘질병과 시각 표현’의 사례로 다뤄졌다는 사실은, 이 연작이 개인의 기록을 넘어 공적 자료가 된 순간을 보여준다.⁴
이 흐름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Blue Skies〉에서 세계가 평면적 배치로 정리되기 시작하고, 1996–1998년 자화상에서는 프레임/이젤/도구 같은 외부 장치가 얼굴을 붙잡기 위해 점점 크게 등장하며, 2000–2001년 드로잉에서는 구성 대신 흔적과 소거가 남는다. 결국 우터몰렌의 말년 작업은 ‘자기표상의 붕괴’가 아니라, 자기표상을 가능하게 했던 규칙이 하나씩 철회되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철회의 자국(프레임, 반복, 수정, 소거)이 곧 작품의 형식이 된다.
여기서 감탄해야 할 것은 “이성의 부재 속에서도 예술이 승리했다”는 낭만적 이야기라기보다, 더 차가운 사실이다. 중심이 흔들릴수록 행위는 더 분명해진다. 완전한 얼굴이 사라질수록, 얼굴을 가능하게 하던 최소한의 형식—경계, 프레임, 반복, 수정, 소거—은 끝까지 남는다. 우터몰렌이 붙잡은 ‘자아’는 완성된 얼굴이 아니라, 얼굴을 가능하게 하는 마지막 습관과 마지막 시도였다. 그래서 그의 회화의 의의는 단순히 “치매 환자의 그림”이 아니라, 초상화가 무엇으로 성립하는지, 그리고 그 성립 조건이 무너질 때 회화가 어떻게 다른 언어(프레임, 반복, 소거)로 옮겨가는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준 기록에 있다.
1. 하이데거와 아도르노의 미학적 문제의식 속에서 예술가는 창작의 ‘주권적 주체’라기보다, 작품이 열어젖히는 진리/사회적 긴장이 통과하는 매개로 재배치된다. 이 관점에서 예술가는 무언가를 ‘임의로 생산’하기보다, 작품이 스스로 성립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통로에 가깝다.
2. 작가 아카이브는 1995년 〈Blue Skies〉를 알츠하이머 진단 직후 제작된 “마지막 대형 작업”으로 위치시키며, 이후 말년 자화상 연작의 변화를 예고하는 분기점으로 설명한다.
3. 우터몰렌의 자화상 연작은 의학교육 맥락에서 알츠하이머 진행에 따른 자기 표상 변화의 사례로 분석·활용된다(예: Harrison의 논문은 자화상들을 교육 전략으로 사용하며 ‘연속적 변화’ 자체를 핵심 자료로 다룬다).
4. 전시·연구 자료들은 말년 드로잉과 자화상이 의학 저널(The Lancet)에 소개되는 등, 예술 작품이 질병의 경험과 인지 변화에 대한 시각적 자료로 공적 맥락에 편입된 경로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