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킨 이도, 기다리는 이도 없지만 묵묵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6년이 된 지 100일.
저는 200일째 나 홀로 미션을 완료했습니다.
그 미션은 바로 필사.
작년 9월 23일이었어요.
청소를 하는데 책꽂이에 꽂힌 새 노트가 유난히 눈에 걸렸습니다.
내년엔 저기에 필사나 좀 해볼까?
미루면 흐지부지 될 텐데.
내년까지 기다릴 거 뭐 있어?
그날따라 마음의 소리가 유난히 소란스럽더라고요.
별 뜻 없이 올해가 며칠이나 남았나 세어보았습니다.
100일.
오늘까지 포함해서 딱 100일 남았네?
그런 건 참을 수 없죠.
이건 운명이다.
그날부로 당장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칼의 노래>를 포기한 적이 있거든요.
400자 원고지 스프링노트를 세 권 채웠지만
소설의 3분의 1에도 못 닿았습니다.
호흡이 긴 글을 그대로 옮겨 쓰는 건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장거리를 뛰는 것 같았어요.
도대체 필사가 뭐가 좋다는 거야?
나랑은 안 맞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마침 선물 받은 필사책이 있어서
이번엔 그걸 활용하는 것으로 시작했어요.
나중엔 짤막한 에세이를 한 편씩 옮겨 썼고요.
제 체력엔 그 정도가 딱 맞았습니다.
단순히 글자만 옮기는 게 아니라,
문장을 음미할 여유를 찾았습니다.
글씨를 쓰는 데 집중하면서 매일
마음 스트레칭을 하는 기분도 들었고요.
물론 시작하자마자 그랬던 건 아니고요,
낙서만 하던 걸 손이 기억해
이게 내 글씨라고?
현실 자각 타임.
습관이 잡히기 전 처음 1~2주는
아! 까먹을 뻔했네.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서
아주 짧은 글을 골라 쓰고 자기도 했습니다.
잘 보이도록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가
본의 아니게 물과 기름기 공격을 한 적도 있고요.
그래도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니 수월해졌습니다.
캠핑을 갈 때도 필사 노트를 챙겨갈 정도로요.
친구들이랑 갑자기 약속이 잡혔는데
당장 준비해서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라
미리 쓰고 갈 여유가 없었거든요.
놀다가 잠시 양해를 구하고 한쪽 테이블에서
그날에 어울리는 시를 검색해 필사했습니다.
딱 올해 100일만 해야지.
그 전략이 먹혔습니다.
매일 필사해야지.
아마 몇 번 하고서 흐지부지 되었을 걸요.
그렇게 100일을 보내고 나니
연말을 굉장히 잘 마무리한 기분이더라고요.
연말 다음은? 연시!
거창한 새해 목표를 세우는 편은 아니지만
필사 미션은 계속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요.
아이패드 드로잉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딱 관심에만 머무른 채 몇 년을 보냈거든요.
그래서 아이패드로 디지털 필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서평단으로 받은 <내가 주어인 문장의 힘>
365 일력 에디션... 까지만 정해 놓고!
어떤 식으로 할지 미리 구상을 좀 한다는 게
차일피일 미루다 덜컥 1월 1일까지 와버렸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도 수정했을 텐데 뭐.
1년짜리니까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캘리그래피 흉내를 내며 일단 시작했습니다.
감을 좀 잡는 듯하다가도 길을 잃기 일쑤지만
100일 치 모아 보니 뿌듯하네요.
연말쯤엔 배경 그림까지 직접 그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265일 뒤엔 좀 더 낫겠죠?
2026년 두 번째 100일이 시작되는 내일부터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 한 줄,
브런치에서 읽은 콱 박힌 문장 하나.
오늘을 손으로 꽉 붙잡아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