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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그늘 May 11. 2023

EP. 18 < 비프로스트 >

포토에세이

  





  수경이는 중학생 무렵, 자그맣고 하얀 강아지 한마리를 입양해왔다. 만난 첫날 너무나도 순하디 순한 그 모습을 보고 가족과 함께 이름을 '순돌이'라고 지었다. 유난히 구황 작물을 좋아하고 웃는 모습이 구름같았던 그, 23년 3월 18일 볕 좋은 날 순돌이는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이른 아침에 소식을 들은 그녀는 우선 제주도행 티켓을 부랴부랴 끊었다. 상실을 잠시 가슴 한 편에 묻어둔 채, 바쁜 근무를 마치자마자 동생과 함께 부모님과 순돌이에게 향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나는 김포공항까지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곁에 있어주는 것 뿐이었다.



  나는 검색대 앞에서 부랴부랴 인사를 마친 뒤 그녀와 그녀의 동생이 검색대 게이트를 지나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는, 창 밖으로 풍경이 넓게 보이는 좌석에 앉아 먼 곳까지 데려다주어 고맙다고 건네준 스콘을 야금야금 먹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했지만 사실, 이가 부딪힐 때 마다 뇌에서 미량씩 새어나가는 정신을 차마 붙들어놓지 못했다. 멍하니 숨만 돌리고 있던 나였다.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이 덜컹일 때 마다, 가슴 속에 뭔지 모를 뭉텅이가 차마 털리지 않고 넘실댔다. 내가 함께 있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얘기했던 그녀였지만, 막상 나는 내가 행동으로서 무언갈 건네 준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생각에 무력감이 들기도 했다. 그 뭉텅이의 정체는 무력감이었을까? 아니, 무력감 따위가 아니다. 나는 그녀의 상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 또한 그녀의 일을 통감하기에 충분히 공감은 가능하다. 다만,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것을 떠나 누군가의 세상을 온전히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이해라면, 나는 아마 평생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괜찮다며 안아주는 것'이라는 이하이 노래 속 가사처럼, 나는 그녀의 상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보듬어줄 수는 있다. 삶의 반려자로서.



  함께 동행하는 모든 이의 무게가 시간이 지날 수록 나이테처럼 짙어지듯, 반려견이라는 단어 또한 차츰 '견'보다는 '반려'에 깊은 무게와 의미가 실린다. 그녀 곁에 손 잡고 서있는 반려자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함께 행복하는 일이겠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가붓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그녀가 영원히 상실을 상실하게, 그렇게.


  그래서, 삶의 도화지 위에 행복의 순간을 무수히 그려놓고 담아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주마등이 필름 영화처럼 펼쳐지나갈 때,

그 필름롤의 길이가 행복의 순간들을 다 담아내기엔 너무나도 짧아 주마등의 순간이 뚝-하고 끊길 만큼 많이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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