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손가락 <이층에서 본 거리>
어느 한 시절 필름 카메라를 취미로 찍어 본 적이 있다. 물론 이 글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무기는 잔잔한 팬 층을 가지고 있던 Pentax MX 펜탁스 MX였다. 조금의 흥미를 가지게 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내 마음대로 도화지에 컷팅을 해 볼 수 있다는 점, 디지털과는 분명히 다른 색감, 무언가 나도 표현이라는 것을 해 볼 수 있다는 지점 등, 매력적인 부분은 흘러넘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흡인력을 주었던 결정적인 재미가 몇 가지 있는데, 공통적으로 몸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의 시선에 작은 긴장감을 유발했다는 점이 끌림으로 다가왔다. 고화질의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마음껏 찍을 수 있는 세상에서 이런 구식행위가 가지는 의미가 있는가.
본 카메라는 오토포커싱이 되지 않는 완전 수동기기이다. 셔터속도 또한 1/1000초가 최대로 다른 제품보다 한계가 있는 카메라였다. 남들보다 초점을 맞추는 데 두 세배는 느리기 때문에 집중하는 에너지는 몇 곱절이 들게 된다. 초점 링을 돌려가다 피사체가 저만치 움직여 버리기 일쑤였다. 때로는 초점거리를 예상해서 다리가 앞뒤로 먼저 반응하기도 했다. 즉, 직접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빠르게 조율을 해야 순간을 놓치지 않게 된다. 흔들림 보정의 기능이 있을 리 없으니 몸이 순간적으로 뻣뻣한 삼각대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런 제약조건 속에서 오히려 무엇을 만들어 간다는 행위가 또렷했고, 불편함 너머 흐르는 즐거움이 있었다.
필름을 사용한다는 한계 또한 존재했다. 36장이란 정해진 탄환이 있다는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장면을 단 한 장만 찍게 된다. 연사로 날릴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은 필름을 사용하는 의미가 퇴색된다는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딱 온 신경을 집중하여 단 한 번만, ‘찰칵’. 그런 제약은 초침이 지나가는 어떤 시간을 잡아내어야 할지 손가락을 긴장하게 한다. 흘러가는 시간들이 예사롭지 않고 약간의 슬로우를 걸고 있는 듯 느껴진다.
뷰 파인더에 보이는 풍경만큼만 필름에 그대로 반영이 된다는 점도 흥미를 돋우었다. 단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면 화면은 딱 사각의 프레임만 보이고 나머지는 검게 절단이 된다.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확대도 축소도 없다. 그림에 어울리는 딱 하나의 구도를 잘라내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SLR 특성상 그만큼의 프레임이 바로 사진으로 나타난다. 95% 시야율이라는 멋진 MX만의 강점도 이를 거들어 주었다. 그 사각에 무엇을 집어넣고 싶은가라는 한계는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런 제약 조건을 가진 카메라를 몸에 지니고 있는 순간에는 걷는 자세가 달라졌다. 어딘가를 가더라도, 어디를 걷더라도 눈은 보이지 않는 사각 프레임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가상의 프레임을 끊임없이 열어두고 색감과 구도와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상과 실제가 매칭이 되기 시작할 때 카메라를 든 손이 움직였다. 그 순간을 잡아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미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간 아무런 반작용 없이 일상을 걷던 나와, 수동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와의 차이가 생기는 지점이었다. 어떤 한계가 부여될 때 몸과 정신이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 이에 따라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비껴간다는 점은 신선했다. 끊임없는 긴장감이 피로감을 유발할 수도 있겠지만 슬그머니 피어오르던 흥취 또한 함께 했다. 수동 카메라를 찍는다는 행위가 별게 있겠냐 싶었는데 불편함을 기꺼이 맞이해 새로운 일상의 풍경을 읽어가려는 나의 시선이 있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바깥을 탐색하는 시선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밤기차 안에서 차량 번호와 그 옆의 전등이 함께 비친 구도를 어두운 실루엣으로 찍어 본 기억이 있다.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보든, 졸리든, 폰을 보든 그냥 흔히 보는 시간과 장소일 뿐이다. 수동 카메라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나 역시 동일한 일상이었을 거다. 하지만 조금 달라진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이야기를 쫓았다, 셔터를 누르던 이유를 잔상처럼 사진 속에 함께 남겼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밤기차의 이야기, 내가 가진 그때의 시선. 일부러 빛을 확 줄여 표현하고자 했던 마음. 가만히 앉아 있는 상태에서도 일상은 여느 일상이 아니고, 시간은 그냥 흐르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 무의식처럼 무언가를 계속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을 즐겼던 것 같다. 마음의 살짝 들뜸. 그리고 아마 그런 시선을 언제나 잊지 않고 유지하고 싶다는 바램 또한 있지 않았을까?
필름 스캔의 압박과 달라진 환경으로 더 이상 카메라를 찍지 않게 되는 시기가 왔다. 이젠 수동기기를 들고 있을 때처럼 시선이 더 이상 번뜩이지도 않는다는 것은 예상할 만하다. 그럼 과거를 회상하며 아쉬워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나가는 시선을 붙들어 둔다는 의미를 경험해 보았다는 것은 내게 소중했다. 그 작은 차이를 몸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언제든 풍경을 능동적으로 흐르게 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매개체는 비단 하나가 아니다. 일상을 약간 난반사하는 무언가는 각자에게 모두 다르게 각양각색으로 존재한다. 과거의 나에게는 수동 카메라가 좋은 도구였을 뿐이다. 그럼 현재 내가 이런 시선을 유지하고 싶다면 어떤 매개체가 동력이 될까. 지금은 글쓰기가 또 다른 견인을 담당할지도 모르겠다. 여기 글을 쓰는 작가님들께서는 아마 비슷한 경험이 있으실 것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 만으로 우리의 일상이 아주 조금은 달라진다는 것을. 어디를 가든, 무엇을 경험하든, 어떤 순간이든 작은 텐션이 만들어진다. 글감이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끊임없이 배경을 만들어내는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이 모락 나는 흰쌀밥을 푸는 와중에도, 다닥다닥 빗소리에 잠을 깨는 새벽에도, 패인 아스팔트의 이질감을 발바닥으로 느낄 때, 퇴근길의 붉은 램프가 아름다운 보케를 만들어내는 중에도 말이다. 어떤 문장은 천천히 영글면서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어떤 단어는 홀연히 떠오르기 때문에 어딘가에 메모해 두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당장 책상에 앉아 한 호흡으로 써 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다. 이 모든 순간은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일상 속에 작은 창 한 켠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 창을 통해 세상의 풍경이 조금은 다른 각도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 눈은 지금 흐리멍텅할 지도 모른다. 나는 어쩜 말 뿐일 바램을 가지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이 느낌을 지지한다는 점은 분명하니까. 그런 마음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리고 그런 예리한 각도를 가진 음악인들과 창작품들을 찾아가며 벡터의 방향을 계속 틀려고 할 것이다. 그 일상 속에서 작은 모멘텀이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기를 기대하면서.
다섯손가락은 오래된 밴드이다. 모두에게 유명한 <새벽기차>나 <풍선>, <사랑할 순 없는지> 등을 잘 기억할 것이다. 음악은 빛바랜 질감이 있어 누구에게는 심심하기도 하겠다. 어느 누군가는 추억을 회상하는 노래로도 기능한다. 이두헌이 부른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은 또 어떤가. https://youtu.be/HtNRmvbOZjc?si=ei7OHmGyQclxXLuK 서투른 연인들의 마음을 적셔주기 더할 나위 없지 않았던가. 비가 오는 날이 공교롭게 수요일이면 어떤 연인들은 한 우산에 장미꽃을 안고 학교 앞을 지나가곤 했다.
여기서 나는 다섯손가락을 이두헌만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들이 이두헌의 밴드는 아니지만 말이다. 메인 보컬인 임형순의 목소리보다 그의 중저음이 더 진실되게 다가왔고, 모두가 떠난 자리 홀로 만든 음반이 좋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가 당시 음악을 만들어 내던 순간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 볼 수 있다. 그 지점은 각자의 마음에서 다시 그려지게 되겠지만 풍경의 아찔함만은 여과 없이 마음을 관통한다. 그는 이쁘고 밝은 음악을 만들기도 했지만 항상 그런 마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의 시대상이 분명 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답답하고 무언가 뿌연 현실에서도 밖으로 시선을 열어놓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얘기했던 무의식적인 긴장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시선이 어떤 촉을 만날 때 크로키같이 갈무리한 음악들이 있다.
3집 <이층에서 본 거리>는 그런 빛나는 순간의 정점이다.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음악을 들으면 카페 2층에 앉아 바깥을 향했을 누군가의 시선을 함께 따라가게 된다. 수녀가 지나가고 외면하는 친구가 있는 거리, 온종일 구경하는 아이와 안개가 피어나는 그 길가에 물끄러미 시선을 두고 있었을 그 시간을 함께 한다. 왜냐하면 그때의 시선은 여기에서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등 다를 것 없는 풍경으로 지나쳤을 일상을 오려낸 그의 기쁨을 함께 한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층에서 바라본 시선을 지니며 살고 싶다는 바램을 얹어 보는 것이다.
다섯손가락 1987년 3집 <이층에서 본 거리>
https://youtu.be/c4AD1wTfi98?si=Oj_6b-zQhIWcSG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