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물건에는 그 목적이 되는 쓰임이 있다. 그것이 없는 물건은 그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여 쉽게 버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비자발적으로 태어난 인간 자체는 어떠한가? 인간의 출생은 생물학적으로 개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다. 설사 부모가 임신과 출생에 있어서 어떤 소기의 '목적'을 가졌었다고 해도 그것은 개인에게 투영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고 인간 스스로가 선언하고 있기도 하고, 인간의 삶이 사실은 정해진 운명이나 어떤 원인에 따른다는 철학도 있지만 이는 단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그저 '비자발적'으로 이 세상에 나와서 자신의 쓰임에 대하여 스스로 정의해 나가야 할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잘하나? 나는 무엇을 좋아하나? 나는 무엇을 하고 살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인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는 그나마 자신의 본질을 조금씩 드러나게 해 주는데, 그것은 직접적으로 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라기보다는 흡사 대증요법(對症療法)처럼 발본색원하지 못하고 임시방편에 머물며, 어느 정도의 타협을 통해서 수많은 선택지를 지워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애매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사회적으로도 자신의 쓰임을 찾으라는 압박에 직면하게 된다. 생계를 목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돈의 가치와 교환하기 위하여, 혹은 인간 사이에서 나의 역할을 찾기 위하여,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찾기 위하여, 혹은 수많은 새털 같은 시간의 권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일 텐데, 자신의 지능, 부모의 재력, 주변 환경, 어울리는 사람, 경험한 사실, 걸어온 길 등 다양한 변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 해야 하는 것의 심각한 불일치와 갈등을 확인하게 할 뿐이다.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 베일에 싸여 있는 경우도 많고, 혹은 그러한 생각자체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는 나의 본디 쓰임을 입증하기 위해, 즉, '천직'(vocation)을 찾기 위해 특히 우리 인생의 초반기는 많은 방황과 혼란으로 점철된다. 그 과정에서 나의 재능, 관심사, 가치, 환경을 탐색하여, 잘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교집합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교집합은커녕 여집합(Complement)인 채로 좋아하는 것은 저만치 두고 해야 할 의무를 마지못해 이행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천직을 찾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적정하게 타협하여 살아간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거나 주변 사람이 원하는 직업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즉, 무엇을 선택했다기보다 그냥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경우가 많다. 반면, 다행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된 사람의 경우에는 삶의 만족도가 급상승하게 되고, 그것의 성과물은 하나의 예술의 경지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어느 순간 딱 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을 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 수 있을까? 하루이틀 한두 달 한다고 그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까? '1만 시간의 법칙'을 주창한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에 따르면, 어떤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만 시간의 의식적인 훈련과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이는 매일 3시간씩 10년, 또는 하루 10시간씩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연습해야 하는 양이다. 물론 단순히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목표를 세우고 몰입하여, 지속적인 어려움에 도전하고 극복해 나가는 '의식적인 노력'을 다했을 때 얘기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냥 산술적으로 따져도 인간은 사는 동안 몇 가지 분야의 전문가가 충분의 될 수 있는 시간의 양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나의 육체 자체도 6개월 전 내가 먹은 음식물의 영양소의 표상이듯이, 우주의 원리는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내지 않는다. 아주 미세한 무엇인가가 쌓이고 쌓여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어 그것이 계단식으로 하나 하나 발전을 도모해 나간 끝에 마침내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결국, 내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는 해봐야 안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스스로의 강점을 구체적인 동사 형태로 정의해 나가며, 타인에게 칭찬받았던 경험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잘하는 일을 통해 인정받고 보상을 얻으면 동기 부여가 되어 결국에는 내가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높게 된다. 무엇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힐 때도 많고, 언제는 좋았던 것이 싫어지기도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 문득 운명처럼 좋아질 수도 있다. 인간의 선호와 성향은 외부적, 내부적인 많은 요인들에 의해 갈대처럼 흔들리고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유독 직함이 중요하다. 어디 소속되어 무슨 일을 하는지가 그 사람을 정의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간주되며, 사회적 지위와 위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우리의 외부 환경은 우리의 쓰임새를 입증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네가 누구인지 대답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나는 그것에 대한 결론을 낼 수 없다. 니체가 직업은 삶의 '척추'(spine)라고 말했지만, 척추는 하나의 장기일뿐, 직업이 나 자신을 정의하지 못한다. 나는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인생의 여행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