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파편화된 디지털 규제 지도

반독점 소송과 주별 프라이버시법이 만든 미국식 ‘실용주의 규제’

by 날개

미국은 EU처럼 모든 디지털 영역을 아우르는 단일한 '입법 청사진'을 설계하는 대신, 시장의 문제를 실용적으로 해결하려는 '다층적이고 파편화된 대응'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거창한 사전 규제 법안들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되는 사이, 미국은 기존 법령의 공격적인 해석과 주(State) 단위의 선도적 입법, 그리고 행정부의 강력한 명령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규제 생태계를 구축했다. EU의 지도가 모든 건물의 높이와 용도를 미리 지정해둔 ‘계획도시’라면, 미국의 지도는 핵심 거점에 강력한 포스트를 세우고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판례로 길을 내는 ‘개척지’의 모습에 가깝다.


미국 규제 지도의 첫 번째 축은 입법의 공백을 메우는 ‘사법적 집행과 행정 명령’이다. 플랫폼의 독점적 행위를 사전에 차단하려던 미국 혁신 및 온라인 선택법(AICOA) 같은 포괄적 법안들이 사실상 폐기되면서, 규제의 칼날은 의회에서 법무부(DOJ)와 연방거래위원회(FTC)로 옮겨갔다. 이들은 새로운 법을 기다리는 대신 기존의 셔먼법(Sherman Act) 등 반독점법을 극단적으로 활용하여 빅테크의 '자사 우대'나 '시장 지배력 남용'에 대해 유례없는 대규모 소송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 2023년 말 발표된 AI 행정명령(Executive Order 14110)은 입법 없이도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고성능 AI 모델의 안전성 보고를 강제하며 사실상의 표준을 제시했다.


두 번째 축은 연방의 지체(遲滯)를 뚫고 나가는 ‘주(State) 단위의 프라이버시 및 기술 규제’다. 연방 차원의 통합 프라이버시법이 부재한 상황에서 캘리포니아주의 CCPA/CPRA는 미국 내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기업들에게 사실상의 연방법(De Facto Standard) 역할을 한다.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버지니아, 콜로라도 등 10여 개 이상의 주가 각기 다른 수준의 프라이버시법을 시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캘리포니아가 대규모 AI 모델의 위험 관리를 강제하는 AI 안전법(SB 1047 등)을 추진하며 기술 규제의 주도권마저 가져가고 있다. 기업들에게 미국 지도는 각 주의 법률 파편을 맞추는 고난도의 컴플라이언스 퍼즐과 같다.


세 번째 축은 가장 최근의 흐름인 ‘특정 타깃을 향한 핀셋 규제’다. 포괄적 플랫폼법이 정쟁으로 좌초되자, 미국 의회는 아동 보호나 국가 안보처럼 초당적 합의가 가능한 영역으로 타깃을 좁혔다. 플랫폼에 아동 보호를 위한 주의 의무를 부여하는 어린이 온라인 안전법(KOSA)이 대표적이며, 외국 적대세력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틱톡 금지법과 같은 안보 기반 규제들이 입법 지도의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2024년 4월 제안된 미국 프라이버시 권리법(APRA)은 파편화된 주법들을 통합하려는 연방 차원의 마지막 시도로 평가받으며 입법 지도의 완성을 향해 달리고 있다.


결국 미국의 디지털 지도는 사법부의 반독점 소송, 각 주의 진보적인 프라이버시 입법, 그리고 특정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핀셋 법안들이 뒤섞인 '다층적 구조'를 띤다. 유럽이 '인권과 공정'이라는 가치를 설계도에 미리 그려 넣었다면, 미국은 '경쟁과 안보'라는 실리를 동력으로 삼아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규제의 요새를 쌓아 올리고 있다. 2026년을 기점으로 주요 주법들이 전면 시행되고 APRA나 KOSA 같은 핵심 법안들의 향방이 결정되면, 미국 역시 EU 못지않게 촘촘하지만 훨씬 더 공격적인 규제망을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기업들에게 미국 지도는 고정된 풍경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화산 지대와 같다. 연방 법안의 폐기가 규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예측하기 힘든 사법적 리스크와 주별 규제의 난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유럽 지도가 '준수해야 할 매뉴얼'이라면, 미국 지도는 '항해하며 실시간으로 대응해야 할 기상도'다. 이 역동적인 지도 위에서 승리하는 기업은 파편화된 규제 사이의 교집합을 찾아내고, 안보와 기술 패권이라는 미국의 독특한 문법을 자신의 비즈니스에 녹여내는 주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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