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자식이라는 형이상학적 굴레와 그 실존적 부조리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피투성(Thrownness)'의 관점에서 볼 때,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도 부조리한 '강제적 계약'이라 할 수 있다. 당사자인 자식의 동의권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체결된 이 계약은, 그 출발부터가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허망한 토대 위에 서 있다.
우선, 생물학적 생산자로서의 부모가 가지는 책임의 범위를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기묘한 모순에 봉착한다.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니 낳은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명제는 인과관계상 완결성을 갖는다. 인간은 다른 포유류와 달리 성체가 되기까지 약 20년이라는 막대한 자원과 감정적 비용을 소모하는 비효율적인 종이다. 이 '양육'이라는 행위는 겉으로 숭고한 희생처럼 보이지만, 차갑게 분석하면 자신이 저지른 '생산'이라는 행위의 뒷감당에 불과하다. 낳아준 것에 대한 감사를 요구하는 것은, 길 가던 사람을 잡아다 강제로 마라톤 경기에 참여시켜 놓고는 "달릴 수 있게 해줘서 고맙지 않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형이상학적 폭력성을 내포한다.
더 부조리한 지점은 이 관계에 투영된 '투자 회수(ROI)'의 심리다. 많은 문화권에서 부모는 자식을 자신의 연장선 혹은 노후의 보험으로 간주하며, 양육에 투입된 비용과 에너지를 '간섭'이라는 형태의 배당금으로 회수하려 든다. 하지만 법적으로나 실존적으로나 부모와 자식은 엄연히 독립된 별개의 개체이다. 타인의 삶에 지분을 주장하는 이 기이한 소유권 주장은, 결국 자신이 죽음으로 소멸할 것이라는 공포를 자식이라는 복제본을 통해 극복하려는 처절하고도 허망한 몸부림에 가깝다.
이 관계가 유독 어려운 이유는 '사랑'이라는 모호한 수식어가 이 모든 부조리한 계산기를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사회는 부모의 책임을 신성시하며 그들에게 무한한 헌신을 강요하고, 자식에게는 효도라는 이름의 부채 의식을 심어준다. 그러나 냉소적으로 보자면, 이는 사회라는 시스템이 투입되는 양육 비용을 개별 가정에 떠넘기기 위해 고안한 정교한 가스라이팅 체계일지도 모른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 비용을 부모라는 개인에게 '천륜'이라는 딱지를 붙여 전가한 셈이다.
결국 인간은 원치 않는 삶에 초대받아, 20년 넘는 강제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시스템의 부품으로 길러진다. 그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채권자와 채무자로 오해하며 갈등하지만, 실상은 둘 다 생물학적 본능과 사회적 설계라는 거대한 굴레에 갇힌 가련한 공범들일 뿐이다. 인생이 출생, 노화, 죽음이라는 통제 불능의 궤적을 그리듯, 부모자식 관계 역시 '선택할 수 없는 시작'이 낳은 피할 수 없는 비극적 희극이다.
이러한 부조리극을 관찰하다 보면, 인간이 서로에게 거는 기대와 간섭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낳아준 것에 대한 감사도, 키워준 것에 대한 보상도 사실은 이 허망한 우주에서 우리가 외로움을 잊기 위해 만든 임시방편의 규칙들일지 모른다. 각자 독립된 주체로서 서로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이 끈적한 부채 관계의 사슬에서 벗어나 각자의 허무한 종말을 향해 담백하게 걸어갈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