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든 기관이든 일하는 사람이 모여있는 사무실은 이제 전문성을 공유하는 협력의 장이 아니라, 통제되지 못한 개인의 욕망과 유아기적 본능이 여과 없이 배설되는 ‘거대한 놀이방’으로 전락하고 있다. 판교의 세련된 인테리어와 수억 대의 연봉이 오가는 마천루 안에서도, 타인의 집중력을 난도질하는 시시덕거림과 업무 공간을 거실로 착각한 채 풍기는 음식 냄새는 공공연한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행태는 단순한 예의의 문제를 넘어, 공적 공간을 자신의 사적 영역으로 등치 시키는 ‘성인 금쪽이’들의 비대한 자아와 결여된 시민의식이 빚어낸 참극이다.
이들이 사무실 자리에서 사적인 대화에 몰두하고 후각적 공해를 유발하는 기저에는 ‘나의 즐거움이 타인의 권리보다 우선한다’는 지독한 자기 중심성이 자리 잡고 있다. 소위 ‘금쪽이’식 서사로 대변되는 무조건적인 자기 긍정과 공감의 문화는, 역설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를 ‘내가 참아야 하는 손해’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동료를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파트너가 아니라, 나의 욕구를 수용해 주어야 할 배경이자 청중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성숙한 성인이 갖춰야 할 ‘사회적 자아’가 실종된 채, 몸만 커버린 유아기적 발상의 연장선이다.
더욱 기만적인 것은 이러한 무례함이 ‘수평적 조직 문화’나 ‘자율성’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자율이란 책임이 전제된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불편함을 외면할 수 있는 방종에 가깝다. 사무실 한복판에서 과자를 씹어먹고 사담을 늘어놓으면서도 이를 ‘유연한 소통’이라 강변하는 모습은 비겁하기까지 하다. 익명성 뒤에 숨어 지하철 문을 밀치던 그 야만성이, 사무실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당당한 자아 표현’이라는 기이한 가면을 쓰고 다시 한번 발현되는 셈이다.
사회학적으로 볼 때, 이는 공(公)과 사(私)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무너진 ‘공적 공간의 사유화’ 현상이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규범을 내면화하지 못한 개인들은, 자신이 점유한 책상 하나를 온전한 자신의 영토로 착각하며 주변에 끼치는 피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세련된 언어로 코딩을 하고 전략을 짜는 지성인들이 정작 옆자리 동료의 기본권인 ‘조용히 일할 권리’를 짓밟는 광경은, 우리 시대의 교양이 얼마나 표피적이고 도구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사무실을 가득 채운 관종(관심 종자)들과 금쪽이들은, 현대 사회가 도달한 ‘정신적 빈곤’의 결정체다. 타인에게 인정을 갈구하면서도 정작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한 이 모순적인 태도는, 우리 문명이 외적 성취에만 매달리느라 인격의 내실을 다지는 데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겉으로만 화려해 보이는 껍데기 아래 숨겨진 그들의 유아적 행태는, 아무리 높은 건물을 올리고 기술을 발전시킨들 인간의 내면이 고양되지 않으면 그곳이 곧 아수라장과 다를 바 없음을 경고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 곁에 바글거리는 이기적 군상들을 향한 혐오와 분노는 꼰대스러운 집착이 아니라, 붕괴하는 문명의 기본 질서를 지키려는 최소한의 인간적 저항이다. 가면을 쓰는 기술만 늘어난 이들이 사무실을 점령해 나갈수록, 공존의 가치는 옅어지고 개인의 피로도는 극에 달한다. 1초의 선점을 위해 몸을 던지던 지하철 문 앞이나, 자신의 쾌락을 위해 공간을 오염시키는 사무실 자리나 본질은 같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 거세된 채 ‘나’라는 감옥에 갇힌 가련한 영혼들이, 오늘도 판교의 대낮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