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정신적 기표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의 공적 공간과 사적인 대화 마당을 점령한 특정 단어의 범람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문명의 외피가 얼마나 얄팍한지 절감하게 된다. 사무실의 휴게실부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하굣길, 심지어는 정갈한 차림의 성인들이 모인 공공장소에 이르기까지, ‘존나’라는 단어는 마치 공기 중에 부유하는 바이러스처럼 모든 문장의 마디마디에 기생하고 있다. 강조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이 비속어의 일상화는, 우리가 향유하는 현대적 교양이 내면화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음을 증명하는 서글픈 지표다.
이 단어의 처절한 어원을 상기해 본다면, 이를 남녀노소 불문하고 거리낌 없이 내뱉는 풍경은 기이함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남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표현에서 유래한 이 저급한 접두어는, 과거에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금기’의 영역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단어는 ‘매우’, ‘무척’, ‘굉장히’라는 아름다운 부사들을 학살하며 언어의 생태계를 단일화해버렸다. 단어의 독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오직 자극적인 타격감에만 매몰된 화자들에게서, 타인을 향한 최소한의 언어적 예의를 기대하기란 난망한 일이다.
특히 지성인임을 자처하는 사무실의 구성원들이나, 가치관을 형성해가는 어린 학생들이 이 단어를 ‘쿨한 소통’의 도구로 오인하는 대목은 참담하다. 업무 공간에서 전문 지식을 논하던 입으로 가장 천박한 비속어를 섞어 강조를 점찍는 행위는, 인격의 분열을 자인하는 꼴이다. 이는 단순히 어휘력의 빈곤을 넘어, 자신의 감정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려는 정신적 노력을 포기한 게으름의 산물이다. 가장 비천한 단어로 자신의 상태를 규정하는 사회에서, 고결한 사유와 깊이 있는 공감이 싹트길 기대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 현상은 ‘공적 자아의 붕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공장소는 타인의 귀와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절제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존나’라는 단어를 배설하듯 내뱉는 이들에게 타인은 더 이상 존중받아야 할 주체가 아닌, 나의 감정 배설을 묵인해야 할 배경에 불과하다.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거세된 채 자신의 강조점만을 관철시키려는 이기주의는, 지하철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무례함과 그 궤를 같이한다.
결국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운 이 비속어의 향연은, 현대인이 도달한 ‘정서적 문맹’의 증거다. 아름다운 형용사와 정교한 수식어들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말초적인 욕설 하나가 독버섯처럼 피어올랐다.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 불쾌함을 감각하는 소수는 오히려 ‘꼰대’라는 낙인이 찍히는 전도된 정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품격 있는 사회는 입 밖으로 내뱉는 단어의 온도와 농도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우리는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며 언어의 품위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혀끝에서 부패해버린 언어를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하는 도시에서, 우리는 과연 서로를 인격체로 대우하고 있는가. 가면을 쓰는 기술은 갈수록 정교해지지만, 그 속에서 뱉어내는 언어의 수준은 갈수록 천박해지는 이 모순적인 행진은 멈춰야 한다. 당신이 무심히 뱉어낸 그 짧은 단어 하나가 실상은 당신의 인격과 우리가 쌓아 올린 문명을 갉아먹는 가장 날카로운 흉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언어의 근원을 상실한 사회에 남는 것은, 오직 소음으로 점철된 야만의 흔적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