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점(冊占)

by 날개

마음이 답답하여 서가에 놓인 아무 책을 무심코 집어 들어 아무 곳이나 펼쳤다.


우연히 선택된 페이지, "책점(冊占)"이라는 글에 눈이 번쩍 뜨이고 마음이 간다.


침울한 나날에 사로잡힌 채, 답답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운명의 발언을 찾아 거기에 자신을 던지기 위해, 책 종잇장 사이에 바늘을 꽂아 그 자리의 책장을 펴보고, 믿음에 차 눈여겨보는 '책점'을 친다.


서양에서는 성서 같은 신뢰가 높은 책으로 책점을 쳐서, 거기에서 방책을 얻고 어려움 속에서 위로를 받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하게도 동양(이란)에도 '파알'(Fal)이라고 불리는 책점이 있는데, 14세기 페르시아의 위대한 서정시인 '하피즈'의 시집을 펼쳐 무심코 들어온 구절을 신성한 계시나 운명의 조언으로 해석하는 점술 행위이다. 이를 '파알리야'(Fāl-e Ḥāfeẓ), '하피즈의 점(占)'이라고도 부른다.


내가 우연히 펼쳤던 책은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서동시집"이었다.


이 책은 '서동(西東)'이라는 제목대로, 독일(서양)의 괴테가 페르시아(동양)의 시인 하피즈에게서 영감을 받아 동양과 서양의 지혜를 융합하여 쓴 시집이며, 그 이해를 돕기 위한 주석과 해설까지 덧붙혀 놓았다.


괴테는 동양과 서양의 유사한 책점 습관을 얘기하면서, 사후 하피즈의 '명예'를 부러워한다. 하피즈의 시집이 책점보는 책이 된 것은, 어떤 부분을 우연히 펼쳐도 다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이 버릴 것 없는 수작(秀作)으로서, 사람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괴테도 자신의 책이 훗날 책점을 치는 책이 되길 '소망'하면서 짧은 글을 맺는다.


그의 사후 193년 6개월이 지난 2025년 10월, 극동의 한 작은 나라에서 한 사람이, 그의 책으로 책점을 보게 되었으니 그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 같다.


책점은 마음의 답답함을 해소하고 삶의 방향성과 전환점을 찾으려는 사람에게 유용하다. 시인이나 작가의 지혜에 길을 묻고 이에 순응하려는 태도는, 삶의 여정에서 이정표를 찾는 행위와도 같다.


괴테가 서동시집을 통해, 하피즈의 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한 것 자체가 순응과 통찰의 지혜를 간파하고 실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우연으로, 우리나라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도 "책점"이라는 시를 썼다는 사실을 알았다.


짧지만 호흡이 넉넉한 시를 음미하면서, 답답함 앞에서도 스스로 길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우연과 자연의 흐름에 맡겨보라는 시인의 위로를 감사히 받을 수 있다.


내 마음이

너무나 답답하여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책을 펴니,

거기

"구름을 따라 나간다"

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 그로부터 나는

아무리 바쁘거나 급해도

구름이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들어 따라 나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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