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패권 시대, 규제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
본 글은 <법률신문> 2025. 11. 6일 자 목요판 13면에 실린, 필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세계적 반도체 장비기업인 'ASML'(Advanced Semiconductor Materials Lithography)의 사례는 첨단 기술에 대한 규제의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1세기 기술 패권 시대에서 규제의 설계는 국내시장에 대한 효율성 vs. 공정성의 프레임으로만 한정해서는 곤란하고, 국가 경쟁과 생존 및 안보의 패러다임까지 고려한 근본적인 시각으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ASML의 반도체 장비는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설비(essential facility)’로 평가된다. 이 기업이 사실상 세계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기술은, 반도체 제조 단계에서 빛을 이용하여 웨이퍼 위에 반도체 회로 패턴을 새기는 과정인 '노광 공정'에서 13.5nm의 극히 짧은 파장의 빛을 사용하여 회로 패턴을 새기는 것이다. 이 기술을 통해서 단 한 번의 노광으로 7nm 이하의 초미세 회로를 구현하게 할 수 있는데, 이로써 공정 난이도가 획기적으로 낮아지고 반도체의 성능과 수율이 극대화된다. 이 초격차 기술은 지난 수십 년간 수조 원의 투자가 집중된 결과물이라고 하며, ASML은 이 기술의 핵심인 광원(light source)과 광학계(mirror) 기술을 내부 및 협력사(Zeiss 등)를 통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이 기술을 구현하는 ASML의 장비 없이는, 5nm, 3nm와 같은 최첨단 로직 칩이나 메모리 칩을 경제적으로, 대규모로 양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계적인 파운드리 기업인 TSMC, 삼성전자 등과 메모리 반도체 선두 기업들 모두 이 장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경쟁 기술로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 결국, ASML의 장비 없이는 인공지능(AI), 고성능 컴퓨팅(HPC) 등 미래 산업의 핵심을 구현하기 위한 최첨단 칩을 대량 생산할 수 없으며, 이 독점적 지위가 곧 전 세계 기술 공급망의 가장 취약하고 결정적인 '병목 지점(bottleneck point)’이 되었다. 그 결과, 이 장비는 단순한 산업 장비를 넘어 국가의 미래를 담보하는 전략적 자산의 지위로 격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기술 우위의 필수설비적 지위가 시사하는 바는, 이제 우리의 규제환경은 기술 패권, 안보, 전략기술, 국가 생존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은 더 이상 단순히 시장에서 사고파는 경제적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적국에게는 군사적 우위를 제공하고, 동맹국에게는 생존과 번영을 약속하는 '전략적 무기'로 부상했다. 미국이 ASML을 압박해 EUV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한 것은 이 기술이 이미 경제 논리를 넘어선 국가 안보 자산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결국, 이 필수설비를 통제하는 것은 곧 미래 기술 주도권을 통제하는 것이며, 주요 국가들은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라는 전통적인 목표를 넘어, 기술 주권이라는 새로운 생존 목표를 설정할 수밖에 없는 국제적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거시적 환경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경쟁법 및 산업규제 담론이 국내 시장의 공정성과 효율성이라는 좁은 틀에만 매몰된다면, 우리는 국가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중대한 이익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입법자나 규제설계자가 국내 문제에 한정된 미시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특정 경제주체의 단기적인 이익인 ‘나무’만 보게 되고, 국가 차원의 장기적인 기술 주권인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즉, 과도하게 '공정성'만을 강조하여 혁신 동기를 꺾거나, 혹은 단기적인 '효율성'을 좇아 필수적인 기술 자립 노력을 포기하게 되면, 결국은 특정 기술 패권 국가에 대한 영구적인 종속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 생존의 문제를 위해 제시될 수 있는 시각으로는, 거시적으로 '기술 주권'(technological sovereignty)'을 경쟁법 및 산업규제의 중요한 법익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 기술 주권은 단순한 ‘자유주의적’ 효율성과 ‘공동체주의적’ 공정성이라는 기존 두 축을 아우르면서도, '국가적 생존(national survival)’이라는 새롭고도 중요한 패러다임이 반영되어야 한다. 기술 주권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전략 기술에 대해 외부의 일방적인 통제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협상할 수 있는 능력'(resilience)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기술패권 시대의 경쟁법과 산업규제는 기술 주권이라는 거시적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하며, 이 목표 하에서 혁신, 효율성, 공정성 등을 치밀하게 조율하는 규제 설계가 요구된다. 국제사회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예측불허한 지금과 같은 시기에 규제 하나가 국가의 명운을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규제 설계와 집행은 국가 정체성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기술패권 시대를 단순한 소비 국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주도하는 주권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