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감에서 상징이 되기까지, 패턴으로 말하는 브랜드의 언어
부드러운 베이지 톤 배경 위로
검은색, 빨간색, 하얀색 선이 교차하는 순간 —
우리는 어김없이 버버리(BURBERRY)를 떠올린다.
버버리의 체크는 본래 안감 속에 감춰져 있었다.
1920년대, 트렌치코트 안쪽에 처음 사용되어
겉으로 드러나기보다, 입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디테일한 패션 포인트로 존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급스럽고 은은한 체크패턴이
인기를 얻게 되자, 점차 외부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산, 스카프, 셔츠, 가방 등 다양한 제품에 적용되는 과정 속에서 더 이상 숨겨진 디테일이 아닌 브랜드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렇다면 버버리는 왜 체크 패턴을 선택했을까?
그 기원은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의 전통 문양인
‘타탄체크(Tartan Check)’에서 시작된다.
과거 타탄체크는 혈통과 신분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무늬였다. 단색은 하인을, 두 가지 색은 농민을, 세 가지는 관리를 뜻했고, 최대 일곱 가지 색이 사용된 문양은 왕족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타탄체크는 사회적 지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언어였고, 버버리는 이 전통적인 상징성을 재해석해 브랜드의 정체성과 품격을 보여주는 고유한 시각적 언어로 발전시켰다.
소비자들은 체크 패턴을 통해 버버리라는 브랜드의 가치와 정체성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패션 요소를 넘어, 체크는 버버리가 상징하는 '영국식 품격'과 클래식한 아름다움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버버리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하는 과도기를 겪었다.
1990년대 후반, 체크무늬가 과도하게 소비되며
한때 ‘촌스럽다’는 브랜드 이미지 위기를 겪었고,
일부 서브컬처나 위조 상품까지 번지며,
고급 브랜드로써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2001년, 크리스토퍼 베일리(Christopher Bailey)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하면서 버버리는 과감한 리브랜딩을 시도한다. 그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재정비하기 위해 체크무늬의 과도한 사용을 줄이고,
보다 절제된 방식으로 버버리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베일리는 전통적인 트렌치코트, 헤리티지 체크 등의 클래식한 코드를 유지하면서도, 스트리트 감성과 하이패션을 결합한 새로운 컬렉션들을 선보이며 버버리를 다시 주목받는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전략은 후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2018년 TB(Tomas Burberry) 모노그램을 새롭게 론칭해 브랜드 리브랜딩의 정점을 찍는다. 이 TB 모노그램은 버버리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상징으로,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넓히며 디지털 캠페인과 협업 컬렉션 등으로 확장되었다.
버버리는 2020년대에 들어서며 MZ 세대와의 접점을 넓히고, 체크 패턴의 소비 방식을 새롭게 재정의하고 있다. 브랜드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대신, 시대의 감각을 반영한 다양한 변주를 통해 체크는 더 이상 ‘클래식한 상징’에 머무르지 않는다.
SNS에서는 셀럽과 인플루언서들이 착용한 뉴 체크 아이템들이 연이어 화제가 되며, 버버리 체크는 다시금 ‘힙한 무늬’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엔 무겁고 보수적인 이미지로 여겨졌던 체크 패턴이 이제는 레트로한 감성으로, 또는 과감한 컬러 믹스와 캐주얼한 스타일링을 통해 믹스매치 아이템으로 젊은 세대에게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의 무게를 지키면서도 ‘가볍고 쿨한’ 정체성으로 유연하게 변화한 버버리의 체크는, 매 시즌마다 새로운 시각 언어로 재해석되며 소비자와의 감각적인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버버리의 체크는 하나의 유행을 넘어, 시대마다 다르게 번역되며 지속적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확장해 나가는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