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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위시 Sep 27. 2022

돈이 없으면 아기를 가질 수 없나요?

가난했던 우리의 인공수정 도전기

이전의 글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난임시술을 시도하게 된 것은 2015년 중반에서 2018년 초반까지였는데, 2015년에는 배란테스트기와 배란일, 체온 등을 이용한 자연주의적 요법만 시도하며 시간을 보냈고, 2016년이 되고 나서야 나팔관 조영술을 하는 등, 본격적인 난임치료에 들어가기 시작했었다. 2016년 초 두 번의 나팔관 조영술을 통해 나팔관 한쪽이 막혀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쪽은 뚫려있고, 둘 다 젊으니 인공수정부터 시도를 해보자는 의사의 권고로 인공수정을 시도하기로 했다.


참고로, 캐나다는 한국과 다르게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아기 시술의 비용이 매우 높은 편이다. 또한 약값도 지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아기를 하려면 부부가 금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했다. 내가 인공수정을 시도했던 2016년~2018년 인공수정 비용은 정부기관에서 받았을 때 회당 350불, 나중에 사설기관으로 옮긴 후에는 500불이었고, 시험관 아기의 경우, 정부기관에서 받았을 때 7500불, 사설기관으로 옮긴 후에는 최소 9000불에서 시작이었다.


문제는 2016년, 2017년의 우리 커플의 경제사정이었다. 2015년에 갓 영주권을 받은 나는 시골에서 평생 살던 남편을 끌고 근처 대도시인 에드먼턴으로 나왔는데, 둘 다 에드먼턴의 삶을 전혀 모르는 채로 이사를 와서 상당히 치안이 좋지 못한 동네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운전 면허증조차 없었던 나는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의 직장을 구해야만 했고, 근처 쇼핑몰의 주얼리 샵에서 세일즈를 하고, 남편은 안타깝게도 직장을 열심히 구해보았지만 일을 하다가 잘리고, 일을 하다가 잘리고 가 반복되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치안이 굉장히 안 좋았던 동네를 얼른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점이었다. 난임도 문제였지만, 얼른 좋은 집을 구해서 이 동네를 벗어나는 것이 더 급했다. 아이는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라고 은근히 속으로 기대했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350불이라는 인공수정 시도 비용도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도해보자며, 나름 거금을 들여서 시도한 첫 인공수정은 2016년이었다.


현재는 인공수정도 배란유도제를 먹어가면서 난포를 조금이라도 더 키우고, 난포가 정말 잘 자랐는지 초음파를 보면서 확인한 후 난포가 잘 자랐다면 정자를 받아, 건강하고 좋은 정자를 골라내서 여성의 자궁 내로 직접 넣어주는 방법이 기본이라고 알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성공률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배란일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언급했건만, 여기의 인공수정은 초음파 한 번을 보지 않고 여전히 배란 약과 배란테스트기에 의지해서 진행되었다. 생리가 끝난 후, 며칠을 먹고 나면 배란이 되는 호르몬제를 처방받고, 근처 날짜에 배란테스트기를 해본 후 배란테스트기 결과가 좋으면 남편의 정자를 받아 좋은 정자를 주입해주고, 그날 밤에 부부관계도 지속하고 하는 식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 있던 내게는 영 옳지 못한 방법이었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 있으면 배란테스트기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는 날도 길고, 막상 그렇다고 해도 배란이 가까워진 것이지 배란이 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은 여러 개의 난자가 한꺼번에 자라면서 생리가 지연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예후인데, 여러 개의 난자가 동시에 자라며 배란 테스트기상 양성이 뜨고, 양성이 한번 뜨면 며칠씩 양성이 뜬다. 일주일~열흘 넘게 피크를 찍을 수도 있는 게 다낭성 난소 증후군인데, 병원에서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배란테스트기가 피크를 보이면 며칠 뒤에 오라고 해서 인공수정을 진행했던 것이다. 내가 실제로 배란이 되지 않았으니 비싸게 돈 들여 골라낸 정자들은 막상 내 자궁 내에서 난자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2016년의 첫 인공수정 시도는 허무하게 끝이 나버렸다. 내 다낭성 난소 증후군 때문인지, 나의 과도한 기대 때문인지 생리가 늦어졌지만 HCG(임신 호르몬) 지수는 정직했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는 지금까지 살고 있는 우리의 첫 집 구매를 완료했다. 집이 생긴 기쁨도 잠시, 이사 직전에 남편이 또 직장을 잃었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운전면허증이 없었다. 당시 도로연수를 받았는데 지금이야 운전을 정말 잘하지만 당시에 운전 공포증이 있던 나는 도로연수마다 눈물이 쏙 빠지게 긴장하고 울곤 했다. 도로주행시험도 세 번 만에 겨우 합격했다. 문제는 우리가 산 새 집이 병원과 내 직장과 차로 30분 거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남편이 직장을 잃었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나를 직장에 데려다주긴 했지만, 나도 한시라도 빨리 직장을 집 근처로 옮겨야 했다. 남편도 새 직장을 열심히 찾아보아야 했다. 실패한 인공수정에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모아두었던 돈은 이미 모두 집을 사는데 부어버렸기 때문에 여유 자금조차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다시 인공수정을 생각할 여유가 생기기까지 꼬박 1년이 넘게 걸렸다. 사실 남편은 고졸 상태인데, 딱히 공부에 뜻도 없고, 게다가 공부머리도 없었다. (그렇지만 정말 사랑한다! 그래도 우리 아이는 내 머리를 닮길! 하하) 남편이 일을 찾는 동안 공부를 한번 시켜보고 대학에 집어넣어 보려고 고등학교 3학년 한 과목을 공부시켜봤는데, 보는 내가 속이 너무 터졌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내가 공부하는 것으로. 짧고 굵게 해서 끝내고, 안정적인 직장을 구할 수 있는 학교 공부가 필요했다. 그렇게 2017 년 초, 나는 일도 파트타임으로 줄이고 공부를 시작했다. 4개월 속성 코스였지만 당연하게도 그 당시에 또 다시 허리띠를 격하게 졸라매야 했던 것에는 변함이 없다. 350불의 인공수정 비용은 우리에겐 사치였다. 성공적으로 코스를 마치고, 자격증을 얻은 나는 2017년 8월 현재 다니는 직장을 얻게 되었다. 캐나다에 와서 처음으로 내가 온전히 발 디딜 곳이 생기던 시점이다. 안정적이고 삶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 이후였다. 남편은 그 사이에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정규직을 구해서 다니고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마음의 여유도 돌아왔다. 이제야 다시 아이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두 번째 인공수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이에 우리의 건강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는 점이었다. 나는 늘 키가 작고 통통한 편이었는데, 2017년의 나는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 이 돼지는 어디서 튀어나왔나 싶을 정도로 뚱뚱했다. 문제는 캐나다 사람들은 어쨌든 그런 나보다도 더 뚱뚱하고 덩치가 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이 쪘어도 어딜 가면 내가 가장 키가 작았고,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그렇지만 당시 내 BMI지수는 29에 육박했는데, 캐나다에서는 과체중의 끝자락에 위치했지만 한국에서는 비만-고도비만 사이의 체질량 지수 수준이었다. 이것마저 다낭성 난소 증후군의 영향일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바쁘게 사느라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결과였다. 비만과 과체중은 결코 임신에 유리하지 않다. 그렇게 두 번째의 인공수정도 실패로 지나갔다.


그리고 2017년 말, 의사가 현재 다니는 공공병원의 난임 시설은 문을 닫고, 사설 병원으로 이전한다고 알려왔다. 그렇게 다시 한번 나팔관 조영술을 2018년 초에 실시하고, 양쪽 모두 다 뚫려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세 번째 인공수정을 시도했다. 방식은 같았다. 사설 병원이라고 해서 초음파를 봐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금액만 150불이 늘었을 뿐이었다. 세 번의 인공수정이 실패로 끝나자, 난임 의사는 약간 난색을 표하며 상담을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둘 다 젊긴 한데 (당시 나는 34세, 남편은 30살로 노산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 착상조차 안되니 인공수정을 더 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이제 남은 건 시험관밖에 없네요"


그러면서 시험관 시술 가격표를 우리에게 남기고 떠났다. 시작 금액 9000불, 약값 최소 3000~7000불. 이제야 돈을 모으기 시작했던 우리에게 그런 큰돈은 없었다. 병원의 대출 담당자가 "만약 대출이 필요하시면 대출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라고 안내해주고 갔다. 대출이라고?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에게 빚을 지운채로 태어나게 할 수는 없다. 아무리 복지국가인 캐나다라도 아이를 키우는데 만만치 않은 비용이 소모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약 40~50프로의 확률로 성공한다는 시험관이 성공할지 여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빚쟁이 태아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1차 난임 시기를 마무리하게 된다.


우리끼리 잘 살다 보면 언젠가 아이가 찾아올 거야, 아니면 우리 둘이 알콩달콩 잘 살면 되지, 라는 희망 아닌 희망을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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