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뭉크'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한다. 피카소 그림보다 비누 냄새가 진동하는 이발소에 걸린 산수화가 더 좋아 보이는 그림 까막눈이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유명한 ‘절규'라는 그림을 보고 싶기는 했다.
기대 반 귀찮은 마음 반으로 가서 예매한 것을 입장권으로 바꾸는데 어떤 일행이 길을 따라 줄 서지 않고 창구로 바로 가더니 표로 바꾸려고 한다. 대기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차는데, 창구 직원이 뒤로 가서 줄을 서라고 한다. 얌체들의 시도가 실패하는 것에 속으로 살짝 고소해했다. 그런데 이분들, 전시관에 들어가면서 또 정해 놓은 길을 따르지 않고, 차단 줄을 들치고는 그 밑으로 들어가려 한다. 몸을 구부려 낮은 자세로 기어들어 가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나름대로 멋 내고 고고한 모습으로 와서 하는 모양을 보니 기가 찬다. 기어이 나도 모르게 한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정말 화가 솟구쳐 생각 없이 말이 그냥 튀어나와 버렸다. "아니, 예술 즐기러 오신 분들이 새치기나 하고 그게 뭡니까”하고 점잖게(?) 한소리를 했더니, 그게 아니고…, 하며 우물쭈물 변명한다. 아내는 왜 그러냐며 외려 나를 쏘아본다. 아내의 나무람과 애처롭게 변명하는 그 사람을 쳐다보는 내가 더 괴로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림을 보고 있었지만, 나도 드디어 꼰대가 되어 가는가, 하는 생각이 수시로 올라왔다. 꼰대는 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늘 나를 방어한다.
집에 돌아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재활용품을 모아놓은 곳에서 경비아저씨가 힘들게 재분류하는 모습이 보인다. 자주 보는 모습이다. 재활용 분류 통에 아무거나 버리는 사람들, 테이프를 뜯어내지 않고 종이상자를 던지고 가버리는 사람 등, 날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계도도 경고도 도통 약발이 먹히지 않고, 애꿎은 경비 아저씨만 더운 날에 땀을 됫박으로 흘리고 있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니 소형차만 대라고 만들어 놓은 작은 주차면을 큰 차가 떡 차지하고 있다. 바퀴 넘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차단 턱 사이로 커다란 차를 절묘하게 밀어 넣었지만 뭉툭한 대가리가 튀어나와 입구의 반은 막고 있다. 오늘따라 얌체 짓들이 모두 궐기하여 나의 심성을 자극하는 모양새다.
얌체의 뜻은 얌치가 없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마음이 깨끗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의 뜻인 염치(廉恥)라는 묵직한 말이 얌체로 변하다 보니 왠지 가볍고 심지어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하물며 옛사람들은 선비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으로 염치를 꼽았으며, 나라를 버티는 네 가지로 '예, 의, 염, 치'를 말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와 끼리끼리의 다툼도 염치가 없는 것에, 그 근원이 있을 것이다.
나아가 얌체는 남의 시간을 훔치는 사람이다. 얌체 짓으로 남에게 빼앗은 시간에 사람 수를 곱하면 엄청난 시간을 훔치는 큰 도둑이다. 오래전 강남으로 출퇴근할 때, 늘 막히는 구간이 있었다. 보통은 2~3Km가 밀리고 1Km가 밀려 있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다. 보통은 1Km를 가는 데 10여 분이 걸린다. 그런데 어떤 날은 차량은 많아도 술술 흘러갈 때도 있다. 바로 갈림길 램프에서 경찰관이 새치기 단속을 하는 날이다. 몇 사람의 얌체가 남의 수천 시간을 훔치는 현장이다.
얌체 짓에 화가 나고 그것을 참지 못해 한마디 한 것이 내내 마음이 찜찜했다. 오지랖이 넓지도 않고 남에게 아픈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성정에 왜 그런 말을 뱉었을까, 하는 후회가 맴돌았다. 돌아와서 책을 읽는데 머리를 쥐어박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스피노자였다. ‘나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행동을 비웃지도, 한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며 오직 이해하려고 했다’라며 나를 꾸짖는다.
그러면서 너는 얼마나 바른생활을 하느냐며 물어오는데 가슴이 덜컥한다. 너도 의도치는 않았다 해도 낯선 길을 핑계로 새치기한 적이 있지 않으냐? 담배꽁초를 몰래 버린 적은 없느냐? 고개를 숙이며 할 말을 잊는다. 늘 나는 나를 이해했고, 타인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꼬불꼬불한 루트가 어지러워서 그랬다는 전시회에서의 그분도 진짜 어지럼증이 있어서 그랬을지 모른다. 종이상자를 던지고 간 사람은 시간이 바빠서였겠지. 주차를 잘못한 사람도 무슨 급한 일이 있었을 테지.
그래, 막 이해하려고 하자. 슬며시 화가 올라오면 속으로만 말하자. 냅 둬! 다 사정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