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또 선거가 다가옵니다. 선거철이 되면 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자주“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다”라고 하셨지요. 늘 온화하고 상스러운 말을 않으신 아버지께서, 왜 그런 냉소의 말씀을 하셨는지 깊이 모르지만, 옛일을 추억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볼까 합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은 무허가집이 모인 동네였습니다. 수채가 흐르는 골목을 두고 신작로 쪽은 각자 주인의 땅에 집이 번듯했으나, 남쪽 철둑길을 따라 이어진 수십 가구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읍내로 살림을 내어 어머니와 어린 누님 셋을 데리고 어느 집 셋방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아이들이 어린 자식들에게 위세 부리는 서러움에 그리로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고서 삼칠일쯤이었다지요.
해방과 전쟁 이후,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운 시절이었습니다. 그 동네는 50년대 중후 반께부터 어려운 사람들이 철로 변 빈터에 마음대로 집을 짓고 살았던 모양입니다. 당시 이만 원인가를 주고 산 것은, 어린 자식들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아버지의 집’이었기에 그리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이 어리숙한 시절이라 그 집이 무허가라는 것을 아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해방 후 서울에서 큰 방직회사의 책임자로, 영등포 어느 적산가옥에서 사셨다던 아버지였습니다. 전쟁이 아버지의 황금기를 모두 앗아가자, 다시 고향에 자리하신 것은 평생의 회한이었겠지요.
그런 시절이어도 나라의 땅에 함부로 지은 집이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기억에 있는 초등학교 시절부터-아마 더 이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연례행사로 자진 철거해라, 강제 철거하겠다는 압박이 있었습니다. 무허가, 철거 같은 붉은 글자가 적힌 양철판이 대문에 박혔던 기억도 납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수심 어린 얼굴을 보는 우리 형제들도 알 수 없는 불안과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장난질도 조심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체, 착한 아이인체하며 불안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반복되는 이 상황에 동네 어른들이 나라에 하소연했지만, 쉽사리 면죄와 해결이 되지 않았음은 당연했습니다. 아무리 절박했어도 법을 어긴 일이니까요. 그나마 억지로 쫓아내지 않는 온정에 으름장으로만 그쳤고, 다음 해에 또 스산한 소문이 동네를 휘감을 때까지는 안도하며 지내는 세월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이런 시간이 이어지자, 동네 어른들이 생각한 방법이 정치인에게 하소연하는 것이었나 봅니다. 어른들이 하는 일이라 그 시초와 내용을 깊게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겨울날, 호롱불이 가물거리며 검은 그을음을 토해내던 우리 집 사랑방에서 동네 어른들이 나눈 말씀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저는 초저녁부터 쏟아지는 잠을 못 이겨 구석에 자리를 깔고 누워있었습니다.
“서울 가서 OOO 이는 만났습니까?” 어느 분이 동네의 좌장 격인 우리 옆집 어른께 물었습니다. “집을 찾아는 갔는데 없다고 해서 깜깜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다가 만나기는 했지….”연통이 어려웠던 시절이라 무작정 의원댁으로 찾아간 모양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서 나는 까무룩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들은 것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모아보면, 집마다 얼마간의 돈을 거두어 의원을 찾아갔고 국회의원이 바뀔 때마다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형편보다 적잖은 지출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동네 사람들은 궁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땅을 점유한 수십 년간의 대가를 한꺼번에 지불하고, 해마다 사용료를 내는 조건으로 간신히 '아버지의 집'이 되었으나, 땅까지 온전하게 아버지의 것이 되기까지는 또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모든 것이 말끔하게 정리된 ‘아버지의 땅문서’를 들고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길고도 至難한 세월이었습니다.
비록 불법의 그늘에 있었으나, 기왕에 살고 있으니 그런 형편을 살펴 주겠다는 그들의 빈말과 어긋난 약속에 배신감이 있었을 겁니다. 그들의 잇속 챙기기와 목마른 바람을 풀어주지 못한 원망과 한으로‘이놈 저놈이나 다 똑같다!’라는 말씀으로 쓰린 마음을 다스렸을 겁니다.
한참 전에 조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세대 간에는 하지 않아야 하는 정치 이야기까지 나가고야 말았습니다. 조카는 변명이 궁해지자 지지하는 사람에 대한 回折의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한 말이 “이놈 저놈이나 똑같아요!”였습니다. 그 말에 쓴웃음이 났습니다. 이 말은 상대와 얼굴 붉혀 다시 만나지 않을 사이가 되는 것을 막아주고, 서로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분칠 하는 아버지의 명언일까 합니다. 정답이 없는 정치판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니까요.
아버지. 또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 정치가 아버지의 실망을 조금이라도 없애주었는지 물으신다면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깡패도 협객으로 불린 시절엔 풍류와 의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듯, 정치는 더 추악하고 어지러워졌습니다.
곧 선거 날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늘 옳으셨습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이놈, 저놈’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또 희망을 걸어보려고 합니다.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놈, 저놈’ 대신에,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똑같다’라고 할 수만 있어도 좋겠습니다. 외람되게 아버지의 말씀이 틀렸다는 불효가 되더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