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5화)
2023년 4월부터 42일 동안 스페인(바르셀로나, 산세바스티안, 빌바오, 마드리드, 세비야, 그라나다), 포르투갈(포루투, 리스본), 모로코(마라케시, 페스, 쉐프샤우엔, 탕헤르)의 12개 도시를 여행하며 경험한 이야기 공유합니다.
예상과 달리 순탄하기만 하던 배낭여행 일정이 드디어 삑사리가 났다. 빌바오에서 마드리드로 이동하던 날이다. 날씨가 추워져서 숙소 근처 쇼핑몰에서 남편의 점퍼를 하나 사고 버스로 터미널까지 이동할 계획이었다.
이제 대중교통도 좀 익숙해져서 출발 시간 30분 남겨두고 짐을 챙겨 나섰다. 구글지도 검색하니 버스 이동시간이 10분이고 바로 앞이 정류장이라 시간은 충분했다. 다섯 번째 정류장에서 내리면 되는 거라 네 번째 정류장 '아우토노미아역'을 확인하고 다음 정류장에 내렸다.
그런데 내려서 정류장 이름을 확인하니 또 '아우토노미아역'인 거다. 뭔 조화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목적지인 터미널까지는 한 정류장, 검색하니 도보 9분으로 나온다. 몇 달 전에 발목이 부러져 아직은 길게 걷기 어려우니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가 다음 버스를 타기로 했다.
구글 지도와 버스정류장 전자안내판에서도 터미널 가는 버스가 곧 온다고 뜬다. 그런데 금세 온다는 버스가 계속 안 온다. 아니, 오히려 도착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여유 있던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하다못해 택시도 보이지 않는다. 마드리드행 고속버스는 3시 출발인데 급기야 10분 밖에 안남았다.
계속 기다리는 남편에게 "더 이상은 안 된다. 이젠 빨리 뛰는 수밖에 없다"고 강권했다. 그래, 뛰자 결정하고 바로 뛰기 시작했다. 캐리어 끌고 지도 보면서 뛰는데 숨이 턱에 찼다. 아픈 다리고 뭐고 상관없이 무조건 뛰었다.
뛰다 보니 나는 뛰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진도가 안 나가고 걸음이 안 걸린다. 저만치 가던 남편이 되돌아와서 내 캐리어까지 두 개를 끌고 뛰었다. 드디어 저 앞에 주황색 건물 빌바오 버스터미널이 보다. 지금처럼 뛰면 탈 수 있겠다 싶어 죽자사자 내리 뛰었다.
터미널에 들어서자 아래층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버스들이 보인다. 에스컬레이터가 보여 타고 내려갔는데 한 개 층을 더 내려가야 버스를 탈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다음 층을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보이지 않는다. 저만치 한국의 지하철 개찰구 같은 게 보이고 사람들이 카드를 대고 들어간다. 여기는 아니지 싶으면서도 핸드폰에 저장해 둔 마드리드행 티켓 큐알 코드를 대보았다.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반대편에 터미널 사무실이 보여 뛰어갔다.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하는데 서로 이야기 나누던 직원 둘은 자기들끼리의 얘기가 끝나니까 그때서야 우릴 쳐다 본다. 다급한 제스처로 핸드폰에 저장된 티켓 보여 주었더니 그는 매우 천천히, 마음 급한 내 눈으로 보기엔 거의 슬로우비디오급으로 천천히 여유있게 이리 오라며 안내한다. 아까 본 지하철 개찰구의 한 칸에 본인의 카드를 대어 주니 문이 열린다. '그라시아스'를 연발하며 마구 뛰었다.
뛰면서 곁눈으로 확인하니 마드리드행 알사 버스 승강장은 20번이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며 시계를 보니 3시 정각이었다. 불과 30미터 앞에 출발하려는 버스가 보인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다. 버스 기사가 출발 직전, 헐떡거리는 우리를 보았고 기다려 주었다. 티켓을 확인하고 연신 "릴렉스 릴렉스" 하며 우리를 안심시킨다.
너무도 고마웠다. 짐칸에 캐리어를 싣고 드디어 버스에 올랐다. 우리가 앉자마자 버스는 출발했고 이미 3시는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고 보니 안도감이 밀려오며 맥이 탁 풀렸다. 비오듯 흐르는 땀을 식히며 한숨 돌렸다. 그리고는 "우리 다시는 이따위 여유 부리지 말자" 다짐했다.
낯선 길을, 길 좀 알게 되었다고 시간에 딱 맞춰 출발하다니. 배낭여행 9일 만에 교만이 하늘을 찔렀네, 반성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창밖을 보니 초록의 평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조금 전까지의 엉망진창 스케줄과 초긴장은 어디로 갔는지 차창 밖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마드리드에 도착하니 퇴근 시간과 겹쳐 차가 꽉 막혔다. 다행히 빈 택시를 발견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갔다.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오늘 같은 날은 무조건 한식을 먹어줘야지 생각하며 한식당을 찾아갔다. 순두부찌개, 짬뽕, 해물전, 계란말이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모든 게 꿀맛이었다.
마드리드에 5일간 머무를 예정이라 여기서 밀린 빨래를 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검색해 근처 빨래방을 찾아갔다. 빨래만 할지, 건조까지 할지, 다림질도 맡길지에 따라 이용 금액이 다르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건조까지 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동안 골목 이곳저곳을 누볐다. 한 골목에 들어서니 플리마켓이 길게 늘어서 있다. 광장이 아닌 골목길에 상당히 큰 규모의 플리마켓이 열리는 게 좀 놀라웠다. 숙소 인근 골목 곳곳에는 향긋한 냄새 풍기는 빵집과 카페들이 많았다. 아침 일찍 문을 열었고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가득했다.
특히 끌리는 카페로 들어가 코르타도와 시나몬 빵을 주문해 먹었다. 코르타도는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넣은 커피다. 당연히 카페 솔로(에스프레소)보다 부드러웠다. 마드리드에서 내가 즐겨 먹은 음식은 '바게뜨 깔라마리'다. 바게뜨 빵 반을 갈라 가운데 오징어 튀김을 넣은 것인데 맥주와 함께 먹으면 환상의 궁합이다. 오징어가 한국의 오징어와는 달리 식감이 엄청 부드러웠다.
마드리드에는 큰 규모의 광장이 여럿이다. 마요르 광장엔 사람들이 가득했고 볼 것이 많았다. 다양한 분장의 탈을 쓴 인형들이 시선을 끌었고 특히 아이들이 좋아한다. 두 명의 경찰이 말을 타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광장의 중앙과는 달리 사방을 둘러싼 그늘 아래의 회랑에서는 장이 펼쳐져 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옛날 동전을 가지고 나와 팔고 있다. 젊은이들 몇몇이 관심을 보이며 흥정한다.
▲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마요르 광장
ⓒ 김연순
▲ 거리에서 행진하며 연주하는 시민관현악단
ⓒ 김연순
막힌 듯 보이는 마요르 광장 곳곳에는 외부로 출입하는 문이 있다. 밖으로 나와 솔 광장으로 향했다. 거리에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관현악단이 합주를 하며 걷고 있다. 꽤 많은 팀들이 차례 행진하며 연주하는데 각 팀에는 젊은 청년부터 나이든 노년까지 남녀노소 다양하다. 중간중간 작은 광장에는 민속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노래하며 춤을 춘다. 공연을 마치면 원하는 시민들과 기념사진도 찍는다. 나도 한번 청해 찍어 보았다.
그 유명한 돈키호테와 산초의 동상이 있는 곳은 에스파냐 광장이다. 돈키호테와 산초를 뒤에서 물끄러미 앉아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는데 바로 스페인의 대표적 작가 세르반테스다.
▲ 에스파냐 광장에 있는 돈키호테와 산쵸의 동상. 뒤에 있는 동상, 세르반테스가 지켜보는 것 같다.
ⓒ 김연순
주말에 레티나 공원에 가려고 숙소를 나섰는데 멀리서 함성소리 같은 게 들렸다. 소리나는 곳으로 향하니 군중들이 모여 나팔을 불며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도로를 점령한 시위대는 마드리드 의사당을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시위대 옆과 뒤쪽에는 경찰들이 교통통제를 하고 있다.
시위대는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구호도 외치지만 중간중간 서로 이야기 나누며 웃으며 행진한다. 피켓에 적힌 스페인어를 번역기 돌려 보니 '건강할 권리가 인권이다'라고 씌여 있다. 시위대 행렬 맨 뒤에 경찰차가 따르고 있고 경찰차 뒤에는 청소차가 따라가며 바로바로 거리 청소를 한다. 청소차가 따라 붙는 게 신기하고 좋아 보였다.
▲ '건강권이 인권이다'를 외치며 집회 중인 시위대
ⓒ 김연순
마드리드는 미술관 투어가 주 목적이라 미술관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정했다. 프라도 미술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이렇게 세 곳은 서로 가깝게 있다. 숙소에서도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한다. 미술관에 대한 안내 책자와 유튜브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듯 해 한국인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미술관 세 곳 모두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다녔는데 그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 프라도 미술관
ⓒ 김연순
프라도 미술관은 사진 촬영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어차피 그림들은 인터넷에 있으니 전시된 작품에 집중하며 관람했다. 수많은 명화들이 있었지만 내게 특히 인상적인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고등학교 미술책에도 나온 익숙한 그림인데 '시녀들'은 너무도 놀라운 작품이다.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그림이 달리 보인다. 이쪽에 서면 안 보이던 배경이 보이고 저쪽에 서면 작품 속 인물들 간의 거리가 달라 보인다. 보이지 않던 공간들도 나타난다. 평면적인 사진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왜 명작이라 하는지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틴토레토의 '세족식'도 그렇다. 그림의 중앙에 예수가 아닌 여러 제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제자들은 각기 다른 자세로 그려져 있고, 제자의 발을 씻겨주는 예수는 오른쪽 구석에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보는 위치를 오른쪽으로 옮기자 조금 전에 본 것과는 달리 놀랍게도 예수가 있는 곳이 중앙으로 보인다. 오른쪽에서 보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인거다. 위치에 따라 달리 보이는게 신기했다. 원근법을 잘 살려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있고,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는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 있다. 이틀에 걸쳐 미술관 투어를 했는데 아쉬웠다. 가이드에게 설명을 들었으니 기회가 된다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다시 한 번 찬찬히 둘러보고 싶다.
스페인 여행하며 마드리드는 볼 게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내 생각에 그건 오판인 것 같다. 미술관만 둘러 보아도 마드리드는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에 풍요로움을 선사할 곳이다.
큰사진보기
▲ 레티나 공원의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즐기는 사람들ⓒ 김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