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4화)
2023년 4월부터 42일 동안 스페인(바르셀로나, 산세바스티안, 빌바오, 마드리드, 세비야, 그라나다), 포르투갈(포루투, 리스본), 모로코(마라케시, 페스, 쉐프샤우엔, 탕헤르)의 12개 도시를 여행하며 경험한 이야기 공유합니다.
▲ 구겐하임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내부. 2층에서 내려다 본 전시물
ⓒ 김연순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에서 빌바오까지는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터미널에 도착해 예약해 둔 오후 3시 출발 버스를 기다렸다. 터미널은 잘 정비되어 있고 여러 도시로 출발하는 버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버스 출발시간에 맞춰 전광판에 하나씩 안내가 뜨는데, 이상하게도 빌바오 가는 버스 안내는 보이지 않는다. 잘못 왔나 싶어 직원이 있는 부스에 가서 빌바오행 버스가 여기서 출발하는지 물었다. 맞다고 한다.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3시가 임박했는데도 감감무소식이다.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터미널을 잘못 찾아온건가,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안내 부스로 쪼르르 쫒아가 또 물었다. 여전히 여기서 출발하는 게 맞단다. 급기야 출발 시간 3시가 되었다. 그때서야 빌바오행 버스가 늦는다는 안내가 나오고, 버스는 결국 3시 20분쯤 왔다.
한국의 고속버스는 항상 정시에 출발하는 것만 보아왔기에 그 상황이 좀 황당했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러려니 하는 것 같다. 나도 평소라면 그 정도 마음의 여유는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때는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서툰 외국어로 소통해야 하는 상황이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영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생각했다.
상상도 못한 디자인의 도시
빌바오는 단지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려고 계획한 일정이다. 그러나 구겐하임이 다는 아니었다. 이름만 들어본 빌바오, 상상도 못한 공간과 아름다운 디자인이 가득한 도시였다.
빌바오 터미널에 도착해 숙소까지는 시내버스를 탔다. 모든 버스가 저상버스인데 버스 안의 풍경이 신기했다. 바닥에 휠체어는 물론이고 유아차가 안전하게 자리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위치 표시가 되어 있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유아차를 미는 누구나 버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유아차 자리로 이 곳이 표시돼 있는 것 자체가 그가 누려야 할 권리임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대단히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 저상버스 내부. 유아차와 휠체어 두는 위치가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다.
ⓒ 김연순
한국은 어떤가.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유모차(그 당시에는 유아차 대신 유모차라고 부르는 게 대세였다)에 탄 아기는 우리 큰 애가 안고, 나는 옆에서 유모차를 얼른 접어서 버스를 타곤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전철에서는 계단 앞에 멈춰 서서 유모차 손잡이와 앞 부분 팔걸이 양쪽을 잡고 힘겹게 오르내렸다. 빌바오의 시내버스를 타면서 보니, 유아차도 휠체어도 모두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구겐하임 미술관은 네르비온 강변에 있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빌바오 뿐 아니라 베네치아와 베를린 그리고 뉴욕에도 있다. 철강산업의 강자였던 빌바오는 철강산업의 주 무대가 한국으로 이동하자 쇠락을 길을 걷고 있었다. 망해가는 조선소와 폐자재로 가득했던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한 덕분에 전 세계로부터 주목받는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얇은 티타늄으로 덮인 미술관 외관은 곡선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며 빛의 흐름이 느껴진다. 안으로 들어서서 만난 첫 전시물은 거대한 철제 구조물이었다. 벽체 따라 한참을 돌다보면 어느새 막힌 곳이 나오고 다시 되돌아 나오길 반복한다. 천천히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인사 나누었다. 2층으로 올라가 내려다 보니 사람은 그 구조물의 움직이는 작은 조각 하나로 보인다.
여러 전시 중에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전시공간도 있다. 제주 본태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어 괜히 반가웠다. 밖으로 나오니 놀랍게도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이 있다. 마망은 거미 형상의 조각품이고 프랑스어로 '엄마'라는 뜻이다. 십여 년 전 캐나다 오타와 국립미술관에 갔을 때 마망을 만났는데 여기서도 또 만나니 신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망은 세계 여러 곳에 있고 현재 한국 리움미술관에도 있다고 한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가장 넓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나와 네르비온 강가를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도로가 뭔가 좀 다르다. 가만히 살펴보니 맨 오른쪽 길은 자동차가 다니는 2차선 도로다. 그 왼쪽 길은 자전거 도로이고 그 다음길은 초록색 잔디가 깔려 있는 길이다. 잔디 위 선로에는 트램이 다닌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내가 걷고 있는 보도가 있다.
▲ 네르비온 강의 주비주리 다리.
ⓒ 김연순
보도의 넓이는 자동차 길의 두 배 이상이다. 길게 벤치들이 늘어서 있어 길을 걷는 누구나 강을 보며 앉아서 쉴 수 있다. 중간중간 조각품도 전시되어 있어 보는 재미도 있다. 도시재생 후 달라진 도로의 모습이다. 이런 길이라면 누구라도 걷고 싶을 것 같다. 허울 뿐인 '탄소중립'이 아니라면, 자동차 길보다는 사람이 걷는 길에 투자해야 하지 않겠나.
청명한 하늘을 그대로 비추는 네르비온 강에는 여러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중 아름다운 주비주리 다리에 가 보았다. 다리의 바닥이 원래는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하도 미끄러져 그 위에 까만 고무바닥을 깔았다고 한다.
다리에 올라 강을 건너는데 놀랍게도 바닥에서 까만 고무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바닥 곳곳에 까만 조각들이 널려 있고 심지어 강으로 계속 떨어지고 있는 거다. 이러면 강물이 오염되는 것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쇠락해가던 빌바오는 민관협력을 통해 도시재생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사례라 알려져 있는데, 그에 살짝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안타까웠다. 빌바오 시민 누군가 문제제기 하지 않았겠나 싶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구겐하임 미술관 외에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곳은 '아주쿠나 센트로아'였다. 이곳은 원래 와인 창고였는데 도시재생사업으로 리모델링 이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수많은 기둥들 중앙에 커다랗고 붉은 조명이 매달려 있었다. 컴컴한 공간에서 그 불빛이 거대한 무게로 내게 다가왔다. 가까이 가보니 스크린에 떠 있는 '인공 태양'이다. 계속 색깔이 변하며 일렁이는데 진짜 태양처럼 느껴졌다. 왠지 모르지만 어릴 때 읽은 전래동화 '불을 삼킨 개'가 떠올랐고 괜히 주변이 뜨겁게도 느껴졌다.
▲ 아주쿠나 센트로아. 와인 창고가 도시재생을 통해 재탄생 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김연순
곳곳에 다채로운 조명과 의자들이 있다. 어떤 공간에는 젊은 청년 십여 명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또다른 공간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바닥에 뒹굴며 놀고 있다. 이런 공간을 자주 접하며 자라는 어린이들은 미적 감각도 상승할 것 같다.
2층으로 올라가 봤다. 드넓은 도서관이다. 1층에서 본 커다란 유리창이 도서관 공간의 창문이었고 창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서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다. 1층에서 봤을 때 의자에 앉은 마네킹처럼 보였는데 책 읽는 사람이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천편일률적인 도서관이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의자와 색다른 배치의 공간이었다.
도서관 공간이 예술작품처럼 느껴졌다. 옆으로 가보니 어린이 도서관이다. 입구에 유아차 세워두는 공간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유아차 탄 어린이도 그 보호자도 편안하게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 같다. 평범한 공간에 디자인이 입혀지면 일상이 예술로 바뀌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네르비온 강변의 건물들, 전통시장, 전철역, 지방정부 청사들이 리모델링을 통해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공간으로 변했다. 걷다 보니 해설사의 안내로 공간의 변화에 대해 설명을 듣는 팀들이 곳곳에 보인다. 스페인 북부의 회색 공업도시로만 알았던 빌바오. 3일간 머물면서 구겐하임 미술관 외에도 빌바오 미술관을 비롯해 다채로운 색깔의 수많은 공간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제대로 된 도시재생사업은 시민의 삶이 빛나도록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