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3화)
2023년 4월부터 42일 동안 스페인(바르셀로나, 산세바스티안, 빌바오, 마드리드, 세비야, 그라나다), 포르투갈(포루투, 리스본), 모로코(마라케시, 페스, 쉐프샤우엔, 탕헤르)의 12개 도시를 여행하며 경험한 이야기 공유합니다.
▲ 산세바스티안 성당 앞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즐기고 있다
ⓒ 김연순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해 뷰엘링 항공의 비행기를 타고 산세바스티안 이룬 공항에 도착했다. 약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가는 도중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저 아래 오른쪽으로 눈 덮인 피레네 산맥이 보인다. 피레네 산맥 너머로는 프랑스다. 역사책과 지리부도에서 보던 피레네 산맥이라니 신기하고도 감격스러웠다.
착륙 위해 지면으로 점점 내려가는데 아름다운 해안이 눈에 들어온다. 비스케이만이다. 그 지형과 풍광이 너무도 아름답다. 산세바스티안이 최고의 휴양지이자 관광지라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구나 싶었다.
영화제가 있는 도시
산세바스티안은 아직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이다. 스페인이 워낙 넓어 북쪽 지방까지 가자면 동선이 복잡해져서 처음엔 갈까말까 망설였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다녀와 본 큰아이의 적극 권유로 이곳을 여행의 한 꼭지로 넣게 되었다. 큰 기대 없었는데 웬 걸, 어째 이제서야 알았나 싶을 정도로 산세바스티안은 너무도 멋진 곳이었다.
이룬 공항에 도착해 숙소까지 공항버스를 탔다. 여느 공항버스와는 달리 마치 시내버스처럼 정류장 곳곳에 서면서 승객들이 만원인 채로 운행한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가득 타서 재잘재잘 거리는데 뭔 말인지는 모르지만 모두 귀엽고 괜히 재밌다.
버스에서 내리니 강변이다. 오분 걸어 숙소인 호텔에 도착했는데 숙소 이름이 '씨네마7'이다. 로비에 들어선 후에야 숙소 이름이 왜 '씨네마7'인지 알았다. 로비, 복도, 엘리베이터, 객실 곳곳에 유명 영화배우들 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산세바스티안 영화제가 있다는 것을 도착해서야 알았다. 올해로 71회차인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는 스페인어권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영화제라고 한다. 한국 영화 몇 편이 수상을 하기도 했는데 그 중 내가 본 영화는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과 <갈매기>(김미조 감독)다. 우리 방은 9층이고 들어가보니 방의 주인공은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주인공 아네타 베닝이다. 사진 속의 아네타 베닝과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짐을 풀고 테라스로 나가 카페 솔로(에스프레소) 한잔 하며 잠시 쉬는데 하늘이 구름 한점 없이 맑고 청명하다. 이제 여행온 지 며칠 되었다고 커피는 마셨다 하면 에스프레소다.
숙소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구시가지로 갔다. 구시가지를 둘러 보는데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해서 깜짝 놀랐다. 사람들 많았지만 거리는 깔끔하고 작은 골목들도 모두 정갈했다. 사람들이 가득한데도 정신없는 느낌보다는 흥겹고 정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평소에는 사람들 가득한 곳을 피곤해 했는데도 말이다.
해지는 강변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혹은 삼삼오오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거리의 돌계단에 앉아 근처 가게에서 주문해 온 핀쵸스를 맥주나 와인을 곁들여 먹는다. 핀쵸스는 주로 바스크 지방 사람들이 먹는다. 바게뜨 위에 각종 재료를 얹어 먹는 것으로는 타파스와 같지만 꼬치를 끼워 먹는다는 점이 다르다.
남편은 핀쵸스 가게를 계속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골라먹는 것을 좋아했다. 가뜩이나 호기심 많은 사람이 온갖 다양한 종류의 식재료로 만든 핀쵸스가 얼마나 좋았겠는가. 번역기 들고 재료 확인해가며 이것저것 선택하는걸 즐겨했다. 간혹 번역기가 사고를 일으켜 엉뚱한 요리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렇게 종종 실패도 했다. 나이든 사람이 인상 잔뜩 쓰며 먹는 모습을 보니 웃기기도 했고 한편 고소하기도 했다. 그러게 왜 나처럼 아는 재료로 만든 음식 고르지 그랬어. 말 안 듣더니 쌤통이다.
라 콘차 해변을 걸으며
▲ 미슐랭 요리 오징어를 얇게 썰어 마치 국수처럼 보임
ⓒ 김연순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미리 예약해 둔 미슐랭 원스타 식당이다. 한국에서도 미슐랭은 한번도 안가봤는데 미식의 도시 산세바스티안에서는 한번 가보고 싶었다. 코스 요리가 차례로 나오는데 매번 나오는 요리에 대해 스탭이 설명해준다. 무슨 재료인지 어떻게 만드는지 대강 알아 들었다. 사전에 예약하며 코스에 나오는 요리를 검색했는데 한 가지 걸리는 건 비둘기 요리였다.
어떤 식당에서는 비둘기 형체가 보이는 그대로 나온다고 했다. 나는 먹지 않을뿐더러 그 자체를 보는 것도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연습해 둔 영어로 비둘기가 통째로 나오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아니란다. 내 것은 비둘기 요리 대신 해산물로 바꿔달라고 했는데 번역기가 말썽이었는지 그대로 나와 버렸다.
짧은 영어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고 내 것은 버섯요리로 바뀌어서 나왔다. 미슐랭의 요리는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모양도 색감도 맛도 훌륭했다. 무려 두시간 반에 걸쳐 천천히 음식이 나왔고 여덟시 반에 시작한 식사는 디저트까지 먹고 나니 밤 11시가 되었다. 서양 사람들은 저녁을 두 시간에 걸쳐 먹는다더니 정말 그랬다.
다음 날 아침 숙소를 나와 대서양을 바라보며 라 콘차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마임 같은 퍼포먼스와 다양한 악기로 버스킹 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막대기를 들고 모래밭에 뭔가를 하고 있었다.
▲ 라콘챠 해변의 샌드아트 모래 위에 그림 그리는 샌드아트 예술가
ⓒ 김연순
두어 시간 지나 돌아올 때 다시 보니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도형의 그림으로 완성되어 있다. 그림 아래 부분에는 지나는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줄 수 있도록 커다란 흰색 천이 펼쳐져 있다. 그 넓은 모래사장에 한줄 한줄 그림을 그린 예술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나도 동전을 던져 주었다.
해변을 걷다 보니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궈보고 싶었다. 내려가 신발을 벗고 해변을 걸었다. 막대기가 보여 장난을 치고 싶었다. 남편 이름의 이니셜을 모래사장에 그렸더니 남편도 따라 한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으니 닭살 행각 좀 벌이면 또 어떤가.
산세바스티안이란 지명은 병자들의 수호성인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바스크 지방에 해당되는 곳으로 바스크어로는 '도노스티아'라고 부른다. 공식적으로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으로 명명하며 모든 관광 안내책자에 그리 표기되어 있다.
바스크 지방은 전통적으로 스페인과는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별도의 자치권도 가지고 있었기에 스페인 중앙정부와는 갈등관계다.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싸우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도시 곳곳이 파괴되었다. 1936년부터 1939년 스페인 내전 끝에 승리를 차지한 프랑코 독재정권은 1975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바스크 시민들을 무차별 탄압했다. 프랑코와 맞서 싸운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고초를 겪었다. 바스크어도 쓰지 못하게 했다.
반대로 투우와 플라맹고는 '스페인다운 것'으로 여기며 적극 권장했다고 한다. 민주화되면서 바스크 지방에 자치권이 허용되긴 했지만 현재 이 지역은 자치를 넘어 분리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거리 곳곳에 그 염원을 담을 바스크 국가가 나부끼고 있다. 프랑코 점령한 후 처형 당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 앞에 나도 잠시 묵상했다.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갖춘 미식의 도시이자 휴양의 도시인 산세바스티안. 나는 이곳을 너무도 사랑하게 되었다. 42일간의 여행을 되돌아보면 나는 이곳이 가장 좋다. 기회만 있으면 또 가고 싶고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다.
이제 산세바스티안을 뒤로 하고 빌바오로 떠난다.
▲ 저항의 기념비 프랑코 독재정권 하에 처형당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 바닥의 스테인레스 판에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김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