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서, 앞으로

by 루나

어디서 살고 싶어?


여행 중독자인 그가 내게 물었다. 딱 한 군데만 고른다면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냐고...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30년 넘게 살아온 '미국!', 그중에서도 캘리포니아라고 말했다.

그는 놀란 토끼눈으로 ‘진짜?’

나는 “진짜로, 진짜!”

그 질문이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빌드업이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세계 곳곳을 다닌 그는, 내가 아마도 본인이 가본 북유럽이나 발칸 같은 곳을 말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풀어낼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대답이 영 단순하고 재미없어, 김이 샌 느낌이었다.


그는 늘 떠나야 사는 사람이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강한 역마를 가졌고, 기회만 되면 떠난다. 동행자가 누구든 일단 나서고 본다.


그는 ‘어디서’를 물었지만, 나는 ‘누구와’를 떠올렸다.

그에게는 사람보다 장소, 관계보다 이동, 결국 ‘여행 그 자체’가 중심이었지만 나는 좀 다르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함께 쌓아온 인연들이 내게는 자산이었고, 그래서 내가 머물고 싶었던 곳은, 결국 그 사람들이 있는 ‘미국’이었다.


미안하다 3년째다


미국에 살 때는 한국이 고향 같았고, 한국에 오니 오히려 미국이 고향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했던 말이다. 사람 좋아하는 내 성향을 잘 아는 친구는 내 역이민에 대해 '2년 본다'고 했다. 친구들 많이 없는 그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단언했다.


사실 그 말에 완전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나는 원래 사람 사이에 있어야 숨통이 트이고, 사람들 속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친구야 미안하지만 3년째다.


나를 놓쳤던 시간들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그 마음을 내 일처럼 받아들이는 나쁜(?)습성이 있다. 그래서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점점 뒤로 밀려나 있었다.


외향적인 성격탓에 어디를 가든 친한 사람을 만들어내고, 무언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나라에서 그렇게 청춘을 지나, 엄마가 되는 어른이 되기까지 언제나 함께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옆에, 뒤에 있는 사람까지 마음 쓰느라 정작 나는 늘 뒤에 서 있었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다.


막상 내가 행복해야 하는데 나는 그 기준을 나에게 두지 않았다. 내 감정의 방향키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살았다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뒤에서, 앞으로


한국에서의 나는 지인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위한 시간이 되었고, 그제야 비로소 혼자 있는 시간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줄고 말이 줄어든 자리에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끝내 나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바쁘게 살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조용한 시간 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는 순간들, 그 여유는 늘 찰나일 때 가장 빛난다. 여유가 계속된다면 그건 어쩌면 무료함일 테니까, 나는 그 짧은 순간들을 더 소중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이 시간은 무료해서 흘려보낸 시간이 아니다. 이제야, 내게 다시 돌아온 시간처럼 느껴진다.


요즘 어디에서 살고 싶냐고 다시 묻는다면
글쎄…
사람만 있다면 어디든 괜찮은데
호르무즈 해협 쪽만 아니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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